2010.03.06 18:39
이인영 글
너절하기로 소문난 AA(American Airlines)편으로 시카고를 떠나서 댈러스에서 여전히 너절한 다른 AA편으로 갈아타며 통틀어 열세시간의 긴 비행 끝에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닿을 수 있었다. AA는 참으로 한심한 항공사였다. 손님을 짐짝으로 취급하는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치부하더라도 기내에서 돌아가는 꼴을 보니 참으로 한심하단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스튜어디스를 부르려고 단추를 누른지가 언제인데 함흥차사다. 참으로 뻔뻔한 인간들이다. 돌아가지 않는 기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꺼져있는 전등은 켜지질 않고 켜 있던 전등은 꺼지질 않는 등 기내가전시설의 조절이 불능에 가까웠다. AA라는 굴지의 항공사가 그런 삐걱거리는 비행기에다 손님을 빼곡히 태우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장사를 해먹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에 열이 오른다.
2010년 1월 31일 아침이 밝았다. 남극여행의 첫 날을 맞은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수많은 옛 석조건물들을 둘러가며 푸른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길이 유난히 넓은데다가 길과 길이 교차하는 곳마다 동상, 석상, 오벨리스크 등을 세워놓은 다양한 크기의 광장이 있고, 길 양편에는 소크라테스를 닮은 울퉁불퉁한 나무와 소피아 로렌을 닮은 쭉 뻗은 야자수가 공존하며, 사철이 따뜻한 곳이라서 게으르고 말 많은 인간들로 떠들썩하고, 큰 도시이기에 소매치기들이 날뛰고 적당히는 더러운 곳이다. 란 큰 길의 폭이 140미터라니 넓기는 넓은 모양이다.
만나는 사람들의 친절한 모습이 마음에 닿는다. 또한 도시공원의 오솔길을 한가로이 거니는 에비타를 닮은 여인에게서는 꽃내음이 난다. 무슨 생각을 하며 걷고 있을까?
우리 일행은 남북으로 뚫린 길에 위치한 란 호텔에 짐을 풀었다. 이 곳에서 동쪽으로 서너 블록만 내려가면 먹자-놀자-골목들이 줄지어 들어선 강가에 닿는다. 우리들은 일단 점심을 들기로 했는데 호텔을 나서자 어디선가 튀어나온 젊은 친구들에게 끌려서 호텔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와 를 안주로 마시는 아르헨티나 맥주가 잘도 넘어간다. 시원하다. 점심으로는 그만이었다. 우리 일행은 동쪽으로 뚫린 길을 내려가 강변을 거닐며 을 즐기면서 여독을 조금은 풀어도 보았다.
가 일단은 마음에 든다. 우리 부부가 묵는 방은 동경의 보통급 호텔의 객실만한 크기로 좁기는 하지만 깨끗하고 직원들이 꽤나 친절해서 좋았다. 지금이 오후 5시경인데 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2010년 2월 초하루다. 오늘도 내일도 바다에서 지낸다. 시속 25마일로 줄곧 달리는데 끝이 없어 보인다. 크루즈란 이런 것인가 보다. 누어서 책을 읽다가 잠이 오면 자고 배가 고파오면 먹으면 그만인 곳이다.
나는 이번 여행에 칼 야스퍼스의 <소크라테스, 석가(釋迦), 공자(孔子), 예수, 모하메드>란 책을 가져온 것을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혹시 시간이 나면 한 번 더 읽어보고 싶었던 책인데 군 시간이 이렇게 많이 날 줄은 몰랐다. 한 다섯 번은 읽었을 터인데도 나에게는 이해가 어려운 내용임을 감출 수가 없다. 야스퍼스의 객관적인 해석을 좋아하면서도 이해 자체가 어려우니 이번엔 마음을 풀고 노트도 해가면서 천천히 읽을 생각이다.
배는 조용히 물살을 가르면서 잘도 달린다. 나는 벌써 심심해진다. 용인은 에 관한 미팅엘 다녀와서는 장사꾼 같다며 불평이다. 오늘 저녁은 정장을 하고 식탁에 앉는 날이란다. 집을 떠난 지 나흘밖에 아니 되었는데 벌써 넥타이를 매고 점잖게 칼질을 하는 식사보다는 간단한 냉면 한 그릇이 생각난다.
2010년 2월 2일이 밝았다. 오늘도 바다의 날이다. 그러니 야스퍼스를 들고 읽다가 졸다가해야한다. 우리들을 괴롭히는 적(敵)에게 어떻게 대해야할까? 이에 대해,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하고 공자는 <선은 선으로 갚고 불의는 정의로 갚으라>한다. 공자의 말이 일단 현실적이란 생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악을 복수하기 위해서 악을 행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이 풍기는 말이다.
우리는 식당가, 상점가 등 배 안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물건들보다는 사람들을 본다. 여행자 가운데는 흑인이 보이질 않는다. 재미나는 현상이 아닌가? 그러다가 영화관에서 란 영화를 보았다. 잘 된 영화다. 우(右)와 좌(左), 부(富)와 빈(貧) 등으로 양극화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상을 이해하려는 과정에서 생기는 심리적 갈등을 다룬 영화인데 내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웠다. 나는 아직도 단조로운 시놉시스로 이어지는 인간적인 내용을 다루는 형(形)의 영화를 좋아한다.
방송이 나온다. 기상조건의 악화로 인해 들리기로 예정되었던 섬의 방문을 생략하고 그대로 남극을 향해 계속 항해한다는 내용이다. 배에서 먹고 자다가 여행이 끝나는 것이 아닌지 조금은 불안해진다. 그리고 조금씩 더 지루해진다.
2010년 2월 3일 바다의 날이다. 바다에서만 삼일 째로 썩고 있다. 배는 를 옆에 둔 채로 남극을 향해 천천히 물살을 가른다. 파도가 높다. 폭풍이 심해 정박이 불가하다니 어쩔 것인가? 속수무책이다. 배에서 먹고 자고 뭉갠다. 책상위에 놓인 카드에는 라고 적혀있다. 종업원의 태도가 귀엽다.
배의 5층에 위치한 로 그림을 보러간다. 의 작품보다는 의 작품이 마음에 닿는다. 200호가 넘는 화폭에 잘도 힘차게 그렸다. 화폭의 중앙으로 지평선이 가로지르고, 마주보이는 지평선의 아래위에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의 원색으로 칠해놓은 바다경치가 마음에 들어 카메라에 담는다.
바다의 날이니 야스퍼스와 씨름을 한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 및 예수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고 전설적인 인물란다. 네 사람 모두는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걸음마를 하면서부터 이제까지 예배당엘 드나든 사람이지만 아직까지도 하늘나라의 진정한 싸인(sign)인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구름을 보고 비가 올 것임을 알고 나뭇잎을 보고 여름이 다가옴을 알면서 아직도 예수는 모르고 지냈으니 답답하지 않은가?
오늘은 2010년 2월 4일 목요일이다. 바다에서만 나흘째다. 배는 남극을 향해 물살을 헤치기는 하는 모양이다. 파도가 극성이다.
책을 읽다 말다 하면서 누어서 뭉개다가 영화관에서란 영화를 아이처럼 재미있게 보았다. 이젠 완전히 아이가 되어 가는 모양이다. 갑판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주어먹으면서 허허거리기도하고 의 선물가게들을 기웃거리면서 시간을 죽인다.
2010년 2월 5일이다. 바다에서만 닷새째다. 이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다. 아직도 바다를 헤매고만 있으니 하는 말이다. 남극의 로 내려가던 배는 풍랑으로 칠레의 으로 방향을 돌려 올라간단다. 먹고 자고를 연습하는 일 외엔 하는 일이 없어 걱정이다. 우울해진다. 의 파고가 10미터라니 배의 요동이 보통이 아니다. 잠자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칠레의 남단에 위치한 이 보인다. 바다만 바라보다가 그나마 땅이라고 만나니 반갑다. 그저 멀리 보일 뿐인데, 그나마 잠시 보는 것이다.
라는 영화가 감동적이다. 남극에 위치한 미국 과학재단의 연구소에서 일어난 실화를 토대로 제작된 영화란다. 한 겨울에 연구소는 폭설예보를 받고 전 연구진이 철수하게 되는데 이 때에 여러 마리의 개(犬)들을 버려두고 나온다. 의도적인 포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개들은 혹독한 추위와 폭설과 배고픔을 극복하면서 살아남아 다섯 달이 지난 후에야 다시 찾아온 연구진과 극적으로 만난다는 이야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영화는 이기적인 또는 동물적인 관계란 등장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개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인간적인 사랑의 관계가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2010년 2월 6일이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지금이 아침 여덟시인데 배는 놀랍게도 아르헨티나의 남단에 위치한 항구도시인 우슈아이아(Ushuaia)에 닻을 내렸다. 참으로 오랜만에 땅을 밟아본다. 바다는 잔잔하고 멀리 보이는 마을의 색깔이 아름답다.
오늘은 을 예약한 날이다. 우리는 작은 배로 옮겨 타고 우슈아이아를 관광하며 좁은 바닷길을 오가면서 바다사자와 각종 새들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를 돌아보는 스케줄을 택했다.
우리는 을 가르며 남쪽으로 내려가 작은 바위섬에 홀로인 붉은 지붕의 아담한 등대를 보았다. 흰 몸통을 까만 색깔의 날개로 감싸고 바위위에 빼곡히 앉아있는 콜보란스라 부르는 새들이 귀엽게 보인다. 얼핏 보아 펭귄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평화스런 그림과 같다. 배는 오던 길을 돌아서 올라가는 모양이더니 서쪽으로 기선을 틀어 를 옆에 버려두고 라푸타이아(Laputaia)를 향해 달린다.
이젠 흙을 밟아보는가 싶다. 그런데 은 참으로 허술한 공원으로 보인다. 작기도 하거니와 볼 것이 없다. 눈 덮인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그 사이엔 황망한 들과 호수와 푸른 산이 멀리 보이는 곳인데도 참으로 한심한 공원이란 인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국립공원이라는 것이 동네 놀이터만도 못하다. 걸레 같이 더럽고 덜덜거리는 버스는 10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기어가면서 네 번을 서서 사진을 찍으라며 우리들을 한참을 내버려둔다. 돌아가는 꼴에 열이 오른다.
한 사람에 149불짜리 유람여행(excursion)이었는데 이 모양으로 끝장을 보았다. 높게 잡아도 25불이면 적당했을 것이다. 오늘 는 우리들을 잘도 뜯어 먹었다. 그래서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배에 돌아오자 나는 닷새 후에 다가올 마드린(Puelto Madryn)에서의 유람계획을 취소했다.
영화 에서 마돈나의 노래가 좋았다. 그나저나 에비타는 역사적인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전설적인 인물이었을까?
오늘은 2010년 2월 7일 다. 배는 남극의 를 향해 높은 파도를 가르며 달린다. 내일 아침 6시면 남극대륙의 한 끝에 닿는단다. 그리고 내일이면 낮의 길이가 거의 19시간으로 길어진다고 한다. 의 그림을 감상한다. 8호가 채 안 되는 요상한 데생들이다. 심심하다.
그래도, 매일 찾아가는 식당인데도 방문을 열고 나와선 오른쪽으로 틀어야하나 왼쪽으로 틀어야하나를 아직도 모르는 너, 마누라를 찾아서 허구한 날 열 층을 헤매는 너, 모두를 위해서 식당매니저를 혼내주는 통뼈인 너, 오바마를 욕하느라 얼굴을 붉히는 너, 깡통김치라도 넣어야 속이 풀리는 너, 그런 너, 너, 너희들로 인해 우리들은 웃고 허허거린다.
2010년 2월 8일 월요일이다. 참으로 역사적인 날이다. 어쩌다 이 지구(地球)에 태어나 남극대륙을 가까이서 보는 날이다. 신(新) 새벽이라 물색은 아직도 검푸른데 눈에 들어오는 낮은 해안과 빙산과 떠도는 크기가 다양한 얼음덩이들이 온통 새하얗다. 만(灣)으로 들어서며 검푸른 색깔이 벗겨지면서 나타나는 하늘색의 바다는 유리바닥과 다름이 없다. 시간은 멈추었고 보이는 장관을 바라보는 인간들은 오랜만에 말이 없다. 참으로 고요하다. 빙산이 보이고 얼음덩이들이 떠다니고 펭귄이 있어서가 아니라 참 고요함이 선사하는 자연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자신을 다듬는 깨달음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참으로 신선한 경함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남극의 드라마는 반나절로 끝이 났다. 그뿐이었다.
오늘은 2010년 2월 9일 바다의 날이다. 우리는 앞으로 이틀간 높은 물살을 헤치고 을 향해 먼 바닷길을 달리고 또 달릴 것이다. 를 피해서 돌아간다니 모래 아침엔 마드린항에 닿을 수나 있을까?
오늘은 2010년 2월 11일 흙의 날이다. 오랜만에 땅을 밟아보는 날이다. 오늘은 우리의 날이고 자유의 날이기도 하다. 마음에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입맛 따라 먹는 날이다. 초여름 날씨 같아 상쾌하고 에서 바라보는 마을이 참으로 아름답다. 부두에서 마을센터까지가 버스로 10분인데 거저 태워준단다. 얼마나 좋은가?
마을센터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자연박물관(Museo Provincial del Hombro Y el Mar)을 찾기로 방향을 정했다. 우선 박물관 건물이 마음에 든다. 넓이가 그만한 삼층 건물인데 돌과 벽돌을 섞어서 잘 지은 건물이다. 그곳에서 각종 새들과 물고기를 보고 크기가 3미터가 넘는 오징어도 보았다. 다음 행선지는 오던 길로 되돌아가다가 해변으로 두어 블록을 내려가서 찾은 이었다. 모니카(Monica)와 미트라(Mitra)는 우리를 참으로 친절히 맞아주었다. 미술관 앞에 서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든다. 젊은 여인의 벗은 뒷모습을 생나무(生樹)에 새겨놓았다. 보기 흉한 장승이 아니라 아름답게 살아 숨 쉬는 여인이 아닌가? 모니카가 친절히 소개해준 음식점 를 찾았다. 해변에 위치한 깨끗한 곳이었다. 우리는 라는 현지식(現地式) 해물덮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이었다. 살만한 것은 모르겠지만 갤러리에 걸려있는 그림들이 좋았다.
오늘 의 스케줄을 버린 일은 참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2010년 2월 12일 바다의 날이다. 배는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Montevideo)를 향해 달린다.
오늘은 2010년 2월 13일이다. 몬테비데오가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들은 가이드가 딸린 버스를 탔다. 시내는 옛 건물들로 빼곡한데 손을 본지가 오래되었는지 낡아보였고 더러웠다. 큰 성당 옆을 그대로 지나가는 꼴이 무슨 꿍꿍이 속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길고 높은 벽에 그려놓은 그림들의 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참으로 잘 그린 그림들이다. 고갱(Paul Gauguin)이 환생한 것일까? 빈촌과 부촌이 가까운 이웃인 도시다. 가 아름답다.
오늘도 우리 마음대로 돌아다녔어야했는데 한테 또 당했나보다. 엉성한 대접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강도를 만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오늘은 2010년 2월 14일이다. 남미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우리는 를 하직하고 버스 편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관광한 후 교외에 위치한 라는 목장에서 바비큐에 맥주를 마시고 비행장으로 가는 일정을 선택했다.
시내관광은 몇 년 전과 내용이 비슷했다.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있는 광장을 중심으로 주위를 돌고 또 돈다. 그러다가 에비타의 묘소에도 가서 걷고, 에서도 내려서 돌아다니고, 가죽소품을 구입하는 가게 앞에다 풀어 놓으면 작고 가벼운 요상한 물건을 찾아서 해매이기도 한다.
나는 한국의 인사동 거리에 해당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예술인의 광장을 좋아한다. 지난번에 왔을 적엔 노상에서 탱고파티가 한참이었는데 이번엔 어쩐지 조용했다. 우리는 예술인의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성냥갑 같은 집들을 조각해서 원색으로 칠해놓은 작은 자석을 구입했다. 우리나라의 달동네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오늘은 2010년 2월 15일이다. 집을 떠난 지 보름이 넘었다. 시카고 시간으로 아침 여덟시는 넘었을 것이다. 비행기가 테네시의 를 넘어서면서 광활한 미국의 중부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끝도 없이 넓은,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인 큰 벌판이다. 장엄한 설국(雪國)이 아닌가? 이에 비하면 9,000킬로미터의 하늘을 나르고 4,000킬로미터의 바닷길을 달려가서 잠시 바라본 남극대륙이란 그저 그만한 별것이 아닌 얼음동산이었다. 끝도 없이 지천(至賤)으로 널려있는 얼음나라를 옆에 두고 그 먼 길을 왜 가야만했던가? 그 곳에서 본 얼음동산은 정녕 설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아직도 설국이란 하얀 얼음산의 기슭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삶의 냄새가 나고, 살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아이들의 부르는 소리가 골을 타고 내려와 산자락을 끼고 퍼져나가는 곳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남극서 우리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실재(實在)를 체험했다. 남극의 경험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신비(神秘)였을까?
두 주간의 남극여행은 이렇게 끝이 났다. 반나절 동안에 그친 남극의 해안관광을 위해 밤낮 9일간을 바다에서 지냈다. 그러나 2010년 2월 8일 새벽 나는 멈춘 시간 속에서 장관을 바라보는 인간들이 말을 잊고 고요함이 계시하는 자연의 소리를 듣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을 다듬어보려는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남극은 그래서 남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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