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9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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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공포증
리싸는 금발 머리에 아먼드 같이 크고 시원한 눈, 그리고 늘씬한 키에 군살이라곤 전혀 없는 탄력 있는 몸매를 자랑하는 19살 된 미혼 처녀다. 요즈음 표현을 빌리자면 전형적으로 ‘쭉쭉 빵빵’한 몸매를 자랑하는 아가씨다. 어린 시절 좀 수줍은 편에 속했지만 그래도 남들과 어울리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15살이 되어 막 고등학교 1학년에 올라가던 해, 연말을 맞아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쇼핑에 나섰다. 선물 몇 개를 구입한 후 몸이 피곤한 듯 느껴져서 그녀는 다리도 쉴 겸 몰 한 가운데 마련된 의자에 앉아 아직 쇼핑을 마치지 못한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쁘게 밀려다니는 인파를 무심히 구경하던 중 그녀는 갑자기 닥친 어지러움증을 느꼈다. 동시에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지면서 목구멍이 막혀 질식될 것 같았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서 그녀는 호흡을 조절하려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이내 손발까지 저리더니 마비가 되는 것 같았다. 마침 쇼핑을 마친 친구들이 머리를 싸매고 웅크리고 앉아 있는 리싸를 발견하여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학교에서도 이런 경험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때마다 양호실로 옮겨갔으며 한 시간 정도 지나야 겨우 평정을 되찾고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발작이 반복되자 그녀는 학교에 가는 것조차 무서워져서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중퇴하고 말았다.
'광장 공포증'이란 질환은 학술어로 Agoraphobia 라고 부르는데 정신과에서는 공포 장애 중에서 특수한 범주로 따로 구분해 놓았다. Phobia는 공포를 말하며 Agora는 예전 그리스에서 사람들이 모여 정치를 논하던 광장이란 뜻이었는데 시장 마당이란 의미로 발전되었다.
지금도 아테네에 가 보면 아고라가 있다. 그래서 '광장 공포증'이란 이 병명은 시장 마당을 두려워한다는 의미 때문에 흔히 많이 몰려있는 군중에 대한 공포라던가 아무도 없는 텅 빈 지역에 대한 공포로 잘못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 정신과 학회에서 내린 정의에 의하면 '광장 공포증'이란 “공황 발작 같은 피치 못할 일이 발생하는 경우에 어디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장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이 위험에서 탈출하기 힘들거나 심히 당황해지는 상황에 대한 공포”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환자들은 남들 사이에서 혼자만 남겨질 가능성이 있는 모든 상황을 기피하려 든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으로 몇 달이나 몇 년이고 바깥출입을 삼가고 집 속에만 파묻혀 사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래도 이런 환자들은 아는 사람과 동반하는 경우에는 밖에 나갈 수 있으며 두려움을 자아내는 상황에서도 남이 있으면 어느 정도 일을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환자를 돌보는 가족이 있으면 외출할 때마다 동반해 주어야 한다.
그 결과 환자는 이런 역할을 맡는 가족에게 자연스럽게 지나칠 정도의 의존성이 형성된다. 광장 공포증 환자를 돌보는 사람은 보통 한 사람에 국한되기 쉽다. 이 사람은 환자에게 “안전”감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집 밖에 나갔다가 갑자기 돌출한 상황에서 남들의 도움을 즉시 받지 못하고 이로부터 탈피할 수 없으리라는 상황은 주로 공황 발작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어지러움 증이나 갑작스러운 설사 같은 난처한 상태도 포함된다.
광장 공포증 환자들이 가장 가기를 두려워하는 장소는 주로 쇼핑 몰, 대형 식품점, 병원, 극장, 운동장, 큰 도로, 공원, 비행장같이 사람들이 많이 몰려다니는 장소다. 이들은 교통이 복잡한 러시아워를 피하며 남이 운전하는 차량의 객석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라도 각종 차들이 몰려다니는 고속도로에 진입하기를 꺼린다.
또 교량을 건너가거나 터널 속으로 통과하는 것도 두려워한다. 엘리베이터 안에 갇힐까 두려워서 한사코 층계만을 이용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필자가 경험한 여러 환자들의 경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공포증은 공황 장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광장 공포증 환자의 95%는 공황 장애(Panic Disorder)를 동반한다.
또 공황 장애를 우선 경험한 환자들에서는 이들 중 1/3이 궁극적으로 광장 공포증이 따른다. 공황 장애와 함께 오는 광장 공포증은 주로 여자에서 많으며 흔히 20대에 발생하는 빈도가 높다.
그러니 사회생활이나 직장 활동, 또는 이성 교제
가 가장 빈번해야 할 이 젊은 나이에 발병하게 되면 환자는 저 혼자서는 몇 년씩이나 집 밖에 한 발자국도 스스로 나서지 못해서 그 아까운 젊은 청춘을 그대로 썩히고 만다.
그 결과 이런 환자들은 남들로부터 소외되어 혼자 외떨어져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그래도 혼자의 힘으로는 이 궁지를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해서 무력감에 쌓이고 앞날에 대한 희망을 잃는다. 남의 도움도 한두 번이지 집 밖으로 나가려면 항상 타인의 도움이 필요함으로 지나칠 정도의 의존적인 성격으로도 변한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광장 공포증이란 심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의존적 성격 장애’와 ‘기피성 성격 장애’가 서로 얽혀 섞여있는 복잡한 형태의 정신 질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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