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4 19:47

바보처럼 살아온 無名敎師의 소리
- 李 春 相 -
(차례) (첨부) 01. 塞翁之馬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 교직은 성직이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거창한 사명감도 없이 사대를 나와 처음으로 교단에 섰었던 지도 어느덧 40여년이 지났다. 가장 의욕적이고 활동적인 청춘시절을 교단에서 보내다가 인생 고희를 넘어 서있는 시점에서 나는 거울 앞에 선 자화상을 차분하게 들여다본다. 가난했기에 육사를 지원하였다. 국비로 공부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었기에, 군인의 길이 적성에 맞는지 어떤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국비 이외에는 다른 진학의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취미 없었던 물리, 화학을 마다않고 이과 반에 들었다. 당시의 육사는 이과학생만 선발하였기 때문이었다. 삼청동 수도육군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한데, 뜻밖에도 축농증이란 진단을 받고 말았다. 불과 며칠 전 국내 굴지의 병원에서 이상 없다는 건강진단을 받았던 나는 수도육군병원의 오진을 확신하며 다음 날 수도육군병원을 찾아갔다. 똑같이 축농증의 진단을 받았던 박흥주 군을 억지로 동행하고... 그렇게도 자신만만하던 나는 축농증이 확인되어 필답고사도 못보고 1차 관문에서 좌절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재수검 자체의 가능성조차 의심하며 동행을 반대하다가 나의 강권에 마지못해 끌려갔던 박 군은 즉시 정정을 받고 당당히 육사에 입학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30여 년 전 남이섬에서의 동창 모임에서 나를 위로하며 박 군은 말했다. 실망하지 마라. 육사를 나온 나, 사대를 나온 너. 아직은 어느 누가 더 잘된 것인지 모르지 않니? 그렇게 말했던 박 군은 군 요직을 거쳐 대령에 이르더니 36년 전 안타깝게도 아까운 나이에 유명을 달리해 지금은 볼 수 없게 되었다. 나 때문에 그는 육사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육사를 나왔기에 군 요직에 있을 수 있었던 그는 10.26이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사라져갔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그를 죽음의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논리의 비약이 나를 무겁게 짓눌러 왔다. 박 군의 슬픈 소식이 전해지던 날 나는 만감이 교차되는 괴로움 속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박 군의 명복을 빌며 나는 수 없이 새옹지마를 되새길 뿐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는 고등학교 때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나는 교사의 본분을 다 하려고 노력하며 싸워왔다. 그렇다, 나는 어느 학교에서나 그 학교에 없어서는 안 될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려고 힘겹고도 외로운 투쟁을 해왔다. 하오나란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사는 방법을 따르는가 하면, 출세의 길을 찾기에 정신없이 뛰고 있는 것 같다. 약은 사람들은 출세를 위해 부당한 지시에 침묵을 지키거나 맹종을 하기도 하고 심한 경우에는 지당장관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세상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나는 참으로 어리석게 살아왔나 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뻔히 눈에 보이는 불이익을 감수하며 부당한 지시나 비교육적인 방침에는 겁 없이 반대를 하기도 하였으며, 많은 교사들이 차마 못하고 있는 정당한 소리를 대변하여 윗사람들의 미움을 받거나 눈의 가시가 되어 왔으니 말이다. 치졸한 20대의 영웅심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무 위로 오르려고 하지 않는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위험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가 나무위로 올라가서 흔들어 주기를 바랄뿐이다. 어리석은 사람만이 나무위로 오르며 때로는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기도 한다. 약은 사람들은 떨어진 연시만 주워 먹을 뿐 부상자의 치료에는 무관심하다. 박수를 받거나 위로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위험을 모르고 나무 위로 올라간 것이 아니면서도 가슴 깊이 밀려드는 이 외로움과 서글픔은 어인 일인가? 때로는 인간의 치부를 보는 것 같아 분노를 느낀다.
평준화 이전의 사립중고 사이에는 재단의 형편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어려운 교육 여건에서도 강 교장의 민주적 운영방침과 가족적인 교직원 분위기 속에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던 동북고에 걷잡을 수 없는 태풍이 휘몰아쳐 왔다. 운영난에 빠진 재단은 파산 상태에 이르고 채권자들이 몰려들어 학교의 존립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시며 사태수습에 최선을 다하시던 이용흡 교감선생님도 말없이 학교를 떠나셨다. 새로 부임한 H교장(이사장의 조카사위)을 중심으로 급조된 학교의 모습은 최악의 상태로 탈바꿈 되었다. 비판적인 젊은 교사들의 공개발언을 봉쇄하기 위해 지시 직원회란 낯선 용어가 사용되어 교사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교직원회의에서의 발언내용을 체크하겠다! 하는가 하면, 교사들의 근무성적에 따라 상여금에 차등을 두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하였다. 모두가 떳떳하지 못한 학교운영에 대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한 긴급조치를 발표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재단의 부채를 갚기 위해 담임교사들에게 뜻있는(?) 학부형을 찾아가서 성금을 구걸(?)해 오도록 지시하고 독촉의 압력을 가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국가의 예산에서 교육에 대한 투자 비율이 선진국에 비해 떨어지는 우리의 교육적 현실에서 볼 때 어떻게 보면 학부형으로 부터의 찬조금은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성금은 글자 그대로의 자의적인 성금이어야 하며 자발적인 성금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육목적에 부합되게 사용되어야 함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학교재단의 부채를 정리하기 위해 찬조금을 징수하러 학부형을 찾아 나서는 교사의 모습, 그 성과를 자랑하는 듯한 경박한 교사의 태도, 그리고 그것을 총지휘하고 있는 H교장의 자세는 교육입국이나 교육은 국가의 백년대계라는 거창한 구호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문제교장 밑에서는 정상적인 교사가 문제교사로 낙인찍힌다. 비판적인 공개발언을 하며 성금은 한 푼도 걷어 오지 않아 눈의 가시처럼 보였던 반골의 교사가 새로운 교육의 터전을 스스로 찾아 나서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뒤늦은 채용고시를 거쳐 1969년 성동교단생활은 다시 시작되었다. 교육공무원이 된 것이다. 사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성낙준 교장을 모시고 순조롭게 발전하던 이 학교에도 L교장이 부임하면서 파란이 일어났다. 교육원칙과는 거리가 먼 방침을 일방적으로 무리하게 강행하려는 관료적인 권위에 젊은 교사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당시의 교육계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던 자유 교양 독서대회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파고를 더욱 높게 만들었다. 교내 매점에 자유교양 도서를 갖다 놓고 학생들의 구매현황을 학급별로 그래프를 그려가며 독려를 하는가 하면, 중간고사의 국어시험을 자유교양 독서시험으로 대체하려는 발상까지 거론되었다. 그런가하면 학생들이 정규수업을 하고 있는 학교운동장 가운데로 택시를 타고 들어오자 젊은 체육교사는 택시운전기사를 끌어내어 교장이 보는 앞에서 앞니를 부러뜨리는 불상사를 일으켰다. 사태는 점차 약화되어 인사조치설이 떠돌았다. 이미 중견교사의 위치에 있던 반골의 교사는 최악의 사태를 막아보려고 중재에 나섰다. 당시의 학생 주임 동석 하에 교장과 원만한 타협을 보았다. 그러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실추된 권위를 찾고자 하는 교장의 독단은 약속과는 달리 L교사와 H교사를 문제교사로 내신해 학년 도중에 전격적으로 다른 학교로 쫓아내었다. 마침내 교장에 대한 성토가 폭발되었다. 궁지에 몰린 교장은 인사조치의 발상을 이 선생에게서 얻었다는 망언까지 하였으나 당시의 학생주임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나는 누명을 벗게 되었다. 교단생활 2년 만에 첫 부임 교에서 문제교사로 쫓겨나 좌절을 당했던 L교사는 몇 년 후 미국 이민 길에 오르게 된다. H교사는 그 후 충북대학교수로 부임하였으나 이것도 전화위복이랄까 그 후 한 달도 못되어 나 또한 빈자리가 있었던 용산고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1974년 12월부터 약 7개월간 계속된 동아일보, 동아방송, 신동아에 대한 광고탄압 사태는 세계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권력의 폭거였다. 권력의 힘으로 언론의 사명을 충실히 다하려는 동아가족을 아사시키려는 권력만능주의에 대해 현명한 국민들은 결코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정의감에 불타는 국민들의 분노와 안타까움 속에 자유언론을 지키자는 동아격려 광고운동은 고등학생들에게도 파급되어 갔다. 용산고 학생회 간부들은 어느 날 갑자기 동아 돕기 성금을 모아서 동아일보로 출발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학교는 황급히 추격대를 보내 동아일보사에 접수되려는 성금과 광고 문안을 모두 압수하고 범인(?)들을 붙들어 오는데 성공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기동성을 발휘한 셈이다. 당시의 유신체제 하의 교육계의 입장을 미루어 볼 때, 중대 범죄를 사전에 예방해 안도와 흥분이 교차되는 학교당국의 태도를 어느 면에서는 동정하면서도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찌꺼기가 남는 것은 어인일인가? 비록 학교의 승인을 받지 않은 모금운동 자체는 경계되어야 할 것이었다 하더라도 불의에 항거하려는 순수한 학생들의 정의감만은 높이 평가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누구로부터도 강요되지 않고 학생 스스로가 용돈을 털어 사회정의와 자유언론의 발전을 위해 모금한 그 성금이야 말로 참으로 티 없는 깨끗한 성금이 아닌가? 소란스런 규탄대회나 가두행진이 아닌 성금으로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려는 청소년들의 용기에서 우리는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밝은 미래상을 엿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의 당당한 태도에 비해 학교 당국이 취한 행위는 너무도 부끄러운 것이었다. 민주시민의 자질을 함양시키며 정의를 가르쳐야 할 학교가 그들을 국사범 다루듯 하였으니 말이다. 며칠 후 1975년 3월 1일 , 화창한 봄날이었다. 공무원이었기에 일신상의 어떤 불이익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애써 지우며 나는 아무도 모르게 다음과 같은 광고문을 가지고 동아일보사를 찾아갔었다. (아들 창훈이의 이름으로 접수함) 『학생들의 동아 격려운동을 억압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서글픔을… Y高 교사』 굳이 교사라고 밝힌 것은 어쩌면 좌절감과 갈등 속에서 헤맬지도 모를 학생들에 대한 속죄의 뜻과 비열한 학교당국에 대한 경종의 의미가 잠겨있었는지도 모른다. 3.1절을 가장 보람 있게 보냈던 그 날, 동아일보사로부터 받은 감사장과 조그만 기념메달을 나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나는 그 메달과 감사장을 후손들에게 가보로 물려주려고 한다. 그것은 천금과도 바꾸지 않을 정신적 가치가 담겨진 영원한 기념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1976년 봄, 용산고 2학년들이 소풍을 간 헌인능에서 용산공고 학생들과 거교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급기야는 용산공고 학생들이 타고 가는 시내버스로 용산고생 수백 명이 둘러싸고 돌 세례를 가해 3대의 버스 유리창을 하나도 남김없이 박살을 내었다. 신고를 받은 기동경찰이 양교 학생 5~6명씩을 경찰버스로 연행하였다. 사태의 악화를 막아보려고 시차를 두고 학생들을 귀가시키려던 양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사태가 백주의 대로상에서 일어난 것이다. 현장으로 정신없이 달려가며 나는 이 엄청난 사태가 학교와 사회에 미칠 파문을 생각하였다. 모든 학급담임들은 자기의 학급 인원 파악과 학생 장악에 정신이 없었다. 학급에 사고가 발생했을 때에 일차적인 책임이 담임교사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현실이다. 사고현장에는 아무도 접근을 하지 않았다. 출동한 경찰에게 망신을 당하게 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이는 상황에서 자기의 학급을 떠난다는 것은 스스로 화를 불러들이는 어리석은 짓이니 그 누구도 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위치에 있던 나는 내 학급을 다른 교사에게 부탁하고 부나비처럼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학생들이 엄청난 난동을 부리고 경찰에게 연행되어 가는데 내 학급의 학생이 아니라고 방관만 할 수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당시의 정확한 교사의 위치였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난동의 주동자처럼 난폭하게 동부경찰서에 연행된 나는 온갖 수모 끝에 5명의 학생들을 석방시켜 통금직전에 학교로 겨우 돌아갈 수 있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출근 즉시 학생들을 데리고 주동자들을 찾아내려는 관활 경찰서로 출장 아닌 출장을 가게 되었다. 해결사로서의 능력을 학교로부터 인정받은 셈이었다. 일주일간의 피로 끝에 소문 없이 학교를 무사히 구해(?)내었지만 다음 해에 용산고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새로 부임한 교장의 비교육적인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1976년 여름, 새로 부임한 K교장은 겨울방학을 불과 10여일 앞두고 2학년 모든 학생들에게 예비고사 준비를 위한 보충수업을 겨울방학기간에 실시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대학 본고사를 눈앞에 둔 3학년을 제외한 일체의 보충수업을 엄금한다는 문교부의 방침에 역행하는 부당한 지시였다. (84년부터 보충수업은 부활됨) 예비고사 합격률이 거의 100%에 이르는 이른바 명문교 학생들에게는 오로지 본 고사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겨울방학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던 당시의 학생들은 거의 학원이나 과외 그룹에 등록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보충수업 전면 금지의 문교방침, 학생들의 학원이나 과외수업계획이 완료된 상황에서 때 늦은 보충수업계획의 발표, 본고사 준비도 아니고 학생들의 관심도 없는 예비고사를 위한 전 교과의 보충수업, 불과 10%미만에 불과한 보충수업 희망 학생 수, 더구나 예산은 한 푼도 없는 학교재정 상태에서 보충수업을 학부형의 성금(?)으로 학생들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명백백하게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실정을 진언하였으나 K교장은 공식회의에서 보충수업은 허가를 받았다고 강변하면서 보충수업에 필요한 일체의 경비를 담임들이 가정방문을 통해 은밀히 만들어 보라는 놀라운 명령까지 내렸다. 성금징수의 학급 책임량을 완수하겠다는 교사는 당시 우수학급을 맡고 있던 K교사 단 한명 뿐, 단호하게 거부의사를 밝힌 것은 어리석은 교사 한명 뿐이었다. 나머지 교사들은 침묵을 지키며 사태를 조용히 관망하고 있었다. 다음날 학년회의 석상. 안보적 차원에서 부조리척결을 호언하고 있던 전두환 정부의 서슬 퍼런 서정쇄신정책에 역행하는 K교장의 방침에 유일하게 정면으로 항의하는 반골 교사에게 격노한 교장의 호통이 떨어졌다. 이 선생! 누가 말썽 나게 거두랬오? 조용히 거두랬지. 겁나면 그만두시오!. 그러나 다음날 아침 K교장은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교장은 성금징수의 지시는 없던 것으로 하라는 후퇴명령이었다. 보충수업은 이렇게 실패해서는 실제와는 정반대로 전원 희망하는 것으로 날조되어 제출되고 그러한 K교사의 유능(?)함이 인정되었음일까? K교사는 그 후 계속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으며 단 7명의 희망자를 보고한 반골의 교사는 태만교사로 날조된 학교장의 내신서 한 장으로 학교를 쫓겨나고 말았다. 너무도 뻔한 이유를 알면서도 교장실로 들어가 어리석은 질문을 하였다. 쫓아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선생의 결강 횟수가 제일 많더군요. 참으로 뜻밖의 답변이 너무도 쉽고 당당하게 K교장의 입에서 나왔다. 지난 봄, 헌인능 소풍때 학교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자비로 동부경찰서에 출장 아닌 출장을 갔기 때문에 나는 계속 결강한 셈이었다. 그 결강은 학교의 간청으로 학교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간 출장 때문인데요. 아! 이 선생 그렇습니까? 그것뿐이었다. 一罰百戒,
뜻밖의 부당한 철퇴를 등 뒤에서 맞고 경동고로 추방된 태만교사는 언론을 통한 공개적인 교사투쟁을 해보려는 충동을 억제하며 지참 한번 없이 새로운 학교에서 충실히 근무를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예기치 못한 광풍이 몰아쳐왔다. 덕망 높던 김상준 교장의 후임으로 부임한 P교장은 5년 만기가 된 K교사를 유임시키기 위해 1년밖에 안된 나에게 교감을 통해 遠距離 내신을 권유해 왔다. 그동안 입을 꼭 봉하고 근신(?)하고 있던 나에게 교감은 말했다. 부족하게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난처한 학교의 입장을 도와달라는 정중한 부탁과 함께……. 참담한 좌절감을 감추며 나는 충분한 설명을 부연하며 그 원거리 내신 권유를 완곡하게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무슨 운명의 작희인가! 나는 다시 한 번 TO조정이란 이름으로 일방적으로 내신당하고 말았다. 연약한 나뭇가지는 조용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으나 억센 바람이 뿌리째 흔들어대고 있었다. 차분한 마음으로 P교장실을 찾아갔다. -역사과는 TO조정으로 어차피 누군가는 한명의 교사가 나가야한다. 당당한 P교장의 설명이었다. 역시 관료적이며 권위적인 의식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버려야 할 학교행정의 유산이 어처구니없게도 반골의 교사를 한 번 더 시험하고 있었다. 학교에 공이 있는 교사를 우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특정인을 우대하기 위해 다른 교사의 인권을 짓밟아도 좋다는 말인가? 원거리 내신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다고해서 당사자를 불러 확인도 하지 않고 인사 조치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원거리 내신이 승낙이면 승낙, 반대면 반대이지 반승낙이란 말은 무엇인가? 교장의 재량권은 경험칙, 타당성, 보편성을 모두 갖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특정교사를 우대하기 위해 아무런 과오도 없이 성실히 근무하고 있는 교사를 일방적으로 추방하는 것은 명백한 직권남용이요 교권유린이 아닌가? 어차피 인생은 연극이라고 했던가……. 내 역할을 이번에는 유감없이 충실히 하여야 겠다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육신의 먼 밑에서부터 전신으로 끓어올랐다. 비상한 때에 비상한 일을 하려면 비상한 결심을 하여야한다는 勉庵 崔益鉉 先生(舊 韓末 巨儒이시며 義兵將)의 말씀을 되새기며 그날은 태연히 교장실을 물러갔다. 다음날 교직원 회의에 나는 녹음기를 휴대하고 결연한 자세로 공개발언에 나섰다. 반골의 교사가 드디어 무엇인가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일까? 직원회의 분위기는 기침소리 하나 없이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번 인사는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힘없는 모든 교사의 교권에 관계된 문제이므로 교권수호 차원에서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필요하다면 나 스스로 교단에서 물러나서라도 교육계의 풍토쇄신을 위해 전력을 다하겠다는 비장한 결의표명과 이임인사를 하였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것이 인간의 속절없는 속성이던가……. 모든 것이 백지로 돌아가고 나에게는 호메이니(당시 이란의 혁명지도자)라는 새로운 악명이 더해졌다. 그 후 나는 참을 수 없는 부당한 학교의 방향에 대해서는 직원회의에 녹음기를 휴대하였다. 스스로의 공개발언에 대한 책임도 지려니와 예상되는 효과 증진을 위함이다. 참으로 별난 놈이다.
1981년 관악고 3학년들이 봄 소풍을 간 장릉에서의 일이었다. 퇴학을 당하게 된 학생 5~6명이 사복차림으로 소풍 차에 와서 술을 마시더니 그 중 하나가 칼을 휘두르며 난동을 부렸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호기심과 함께 공포에 떨고 있었다. 너무도 이름난 학생이 흉기를 들고 누구라도 가까이 오면 찌르겠다고 위협을 하고 있으나 아무도 접근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바보 같은 무명교사는 또다시 돈키호테의 용기가 솟아오른다. 힘으로 처리하겠다는 P선생을 제지하며 바보 같은 교사는 설득을 하고자 서서히 난동학생 앞으로 다가섰다. 무슨 해결사라도 된 듯 한 착각에 빠졌음일까? 비록 흉기를 들고 있다고는 하나 학생을 폭력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더 큰 불행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설마 네가 나를 찌르겠느냐? 다름 아닌 나인데……. 하는 자만심을 가지고 칼을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었다. 부임한지 불과 2개월밖에 안 되는 신임교사인 나는 난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가 어떤 내력의 학생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에 있었다. 순간 작지만 날카로운 칼이 허공을 가르며 나를 향해 날아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피하는 얼굴을 대각선으로 비켜가며 칼은 잠바의 오른쪽 어깨 끝을 베고 지나갔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난장판이 된 소풍지에는 어떤 위기감이 감돌았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교사들의 인솔아래 학생들은 귀가를 서두르고 나와 몇몇 교사들은 장시간에 걸쳐 난동학생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붕대를 얼굴에 칭칭 감고 병실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도하는 TV 화면을 상상하며 고소를 날렸다. 피바람을 미연에 방지하였다는 안도의 숨결 뒤에 형언할 수 없는 찌꺼기가 남는다.
나는 참으로 어리석게 살아왔다. 거울을 본다. 아빠! 선생님 그만둬~ 회사에 들어가! 귀를 막는다. 무능한 아빠요 무정한 남편으로 몰아치던 어린 딸의 모습을 뒤로 두고 다시 자화상이 떠오른다. 정년까지 교단을 지킨다 하여도 평교사로 외로운 길을 걸어가고 있을 허연 백발의 모습이 보인다. 갑자기 거울이 흐려진다. 늘어난 주름살에 피로가 역연하다. 계란으로 바위를 때려 본 그 만용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한다. 그렇다. 그것이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 제목이다. 읽혀지지 않는 책은 존재의 가치가 없다. 얼마나 읽혀질까? 비록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다 하여도 햇빛을 보이고 싶다. 교사의 신분으로 교육계에 대한 비판의 글을 공개적으로 쓴다는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부끄럽기도 하고 분수를 모르는 철없는 짓 같은 생각이 몇 번이나 들어 망설이게 된다. 성역에 도전하는 듯한 심정이기에 이로 인해 일어날지도 모를 모든 파문을 그려본다. 피해의식을 느낄지도 모르는 특정인의 항변, 상부 교육기관의 시각 등등…….. 그러나 어쩌면 부당한 권위 앞에서 정당한 양심의 소리가 지금도 짓밟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이 조그만 소리가 교육계의 풍토개선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용기를 내었다. 특정인에 대한 한 때의 미움도 이제는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희미하다. 보잘 것 없는 이 잡필로 인해 불편해지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 없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끝 *전 동북고, 성동고, 용산고, 경동고, 관악고 교사. http://www.seoul10.org/zerobd/data/Free_Exercise/20081114201928_5_lcs006.jpg http://www.seoul10.org/zerobd/data/Free_Exercise/20081114201928_6_lcs002.jpg http://www.seoul10.org/zerobd/data/Free_Exercise/20081114201928_7_lcs003.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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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어제와 오늘' 칼럼을 접으며 - 박용배 - | 이범상 | 2009.01.24 | 6601 |
| 30 | 경제위기와 전직대통령 (글쓴이;청당 민 병문 헤럴드경제신문 주필) [1] | 박근준 | 2009.01.05 | 5264 |
| 29 | 2008년 가을의 만남 | 원방현 | 2008.12.03 | 5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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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처럼 살아온 無名敎師의 소리
| 이춘상 | 2008.11.14 | 4989 |
| 27 | 雨의 힘찬 글을 받아보니/정태섭의 편지/심재우 제공 | 원방현 | 2008.11.07 | 5581 |
| 26 | 헤어진지 사흘 째/이현구의 편지/심재우 제공 [1] | 원방현 | 2008.11.06 | 5032 |
| 25 | 아름다운 꿈속에서 깨어/심재우의 편지/50주년 행사참가 후 [2] | 원방현 | 2008.11.05 | 5145 |
| 24 | 졸업 50주년에 생각나는 친구들(1)/백관익 [1] | 원방현 | 2008.10.08 | 5062 |
| 23 | 새삼스러운 아쉬움 | 원방현 | 2008.10.04 | 55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