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제10회 동창회

한국어

글모음 2

김기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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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이 된 대군 부인의 행보♧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송 씨는 
세종의 며느리로 역사에 등장하여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여섯 왕의 비호를 받으며 
호화로운 삶을 살다 갔다. 

 

그녀의 남편 영응대군은 
38세의 세종과 40세의 소헌왕후가 
여덟 번째로 낳은 막내아들이다. 

 

송 씨는 대군의 나이 12살 때 
부인으로 봉해졌는데, 
4년을 살고는 쫓겨났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송 씨를 내치고 
새 부인으로 바꾼 것은 
순전히 시아버지 세종의 뜻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세종은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에서 눈을 감는다.

 

☆세종이 내보낸 며느리, 
    다시 돌아오다

 

  3년 상을 치른 영응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재가를 얻어 
현재의 부인과 이혼하고 
전처 송 씨와 재결합하였다. 

 

송 씨를 잊지 못해 몰래 만나 
딸 둘을 낳았던 것이다.

 

(단종1년, 1453) ​ 
재결합에 성공한 그들은 
곧이어 단종의 혼인에 간여하는데,

친정 조카가 
왕비로 간택되는 쾌거를 이룬다.

 

정순왕후 송 씨는 
대군 부인 송 씨의 조카이다.

 

영응대군은 안국방의 저택에다 
재물 또한 누거만(累巨萬)이었다. 

 

늦게 낳은 아들을 너무 사랑한 아버지

세종의 유언으로 
내탕고의 모든 보물을 받게 된 영응대군은 
노비 1만 명을 거느리는 
거부가 된 것이다. 

 

그런 영응대군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모든 보물은 송 씨의 것이 되었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세조는 
그 부인 송 씨와 조카 딸 길안현주(吉安縣主)를 
극진히 보살피고 
많은 재물을 내려주었다. 

 

왕의 비호를 받는 
송 씨의 권력도 점점 높아졌다.
 
한번은

대신들을 초청하여 진수성찬을 차렸는데, 
보장(寶障)으로 두른 
특별한 한 자리에 
사위 구수영(具壽永)을 앉혔다.
 
그리고 궁정 옷을 입힌 
여종 수십 명을 좌우로 시립(侍立)하게 하였고, 
객으로 온 대신들에게 
사위 구수영을 받들도록 했다.

 

(예종 1년, 1469) 
이른바 ‘궁정놀이’를 한 것인데,

뒷말이 많았다. 

 

송 씨는 궁궐에 무시로 출입하면서

왕실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다. 

 

송 씨가 진상(進上)한 비(婢)가

대내(大內)에 깔려 있어 
궁중의 내밀한 정보까지 
밖에서 다 받아볼 수 있었다. 

 

대신들에게 
송 씨는 당연히 눈엣가시였고, 
그로 인해 
왕과 신하들의 논쟁이 잦았다. 

 

어느날 성종 임금은 
외출했다 환궁하면서 
송 씨 집으로 행차하여 
곡식 50석을 하사했는데, 
경연에서 이 행차가 문제 되었다.

 

신하 : 
구수영으로 말하면 
일개 어린 신하인데,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몸을 가벼이 하여 가서 보십니까? 

 

임금 : 
구수영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조 때부터 대군의 부인을 
매우 후하게 대우했기 때문이다. 

 

또 지나다가 들른 것이지 
일부러 간 것은 아니다.

 

신하 : 
부인을 위한 것이라면 
더욱 잘못입니다. 

 

부인을 보기 위하여 
여항(閭巷)으로 행차를 하심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전하의 동정(動靜)은 
사관(史官)이 반드시 기록을 하니,

이렇게 
경솔하게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임금 : 
내가 참으로 실수를 했으니,

앞으로는 마땅히 삼가겠다.

 

신하들에게 혼이 나고도 
송 씨에 대한 성종의 비호는 
그치지 않았다. 

 

그런 틈을 타 
송 씨는

임금의 뜻에 영합한 대사헌을 움직여 
송사가 일어난 재산·전답·노비 등을

가로채기도 했다.

 

(성종 22년, 1491) 
왕은 또 송 씨 소유의 암태 목장을

호조에게 사 주라고 명령했다.

 

호조에서는 
“물과 풀이 부족하여 
말을 먹이기에 적당치 않은 허허벌판인 땅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라고 하며 
사줄 수 없다고 했다.

 

(성종 24년,1493)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 씨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졌다. 

 

왜 이렇게까지 지나치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대신들에게 
왕은 
"어찌 연유가 없겠는가"
 라고 했다.

 

☆국왕과 거래하며 재산 늘려가

 

성종이 보위에 오를 때 
송 씨는 자신의 저택을 기증했는데,

바로 연경궁(延慶宮)이다. 

 

재물로 
왕과 일종의 거래를 한 셈이다. 

 

송 씨를 비호하는 절대 권력은

연산군으로 넘어갔다. 

 

새 왕이 탄생하자 송 씨는 
각종 보물과 노리개를 바쳤다. 

 

이에 신하들은 
그런 물건은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이치에 
어긋난 일임을 설파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송 씨는 권력을 이용하여 
재물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다시 재투자하여 
키우는 방식으로 재물을 관리했다. 

 

즉 국왕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아 
통 크게 베풀고 거둬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재물로 절을 창건하여 
절 출입이 잦았던 송 씨는 
결국 추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동대문에 방(榜)이 붙었는데,

“영응대군 부인 송 씨가 
중 학조와 사통(私通)을 했다”
는 것이다. 

 

그런데 연산군은 도리어 
이것을 상언한 신하를 구속하였고,

사관에게 명하여 
송 씨에 대한 소문을

기록에서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연산군의 이 말까지 기록한

조선시대 사관의 기록 정신이 
새삼 돋보인다. 

 

70을 바라보는 송 씨에게 
그 추문은 어쩌면 
지나친 탐욕이 불러온 
모함일 수도 있겠다. 

 

왕과 송 씨의 거래는 계속되었다. 
송 씨는

양주 석도(石島)의 뽕나무 밭 7결(結)을 바치고, 

쌀 80석을 하사받았고


(연산군 6년, 1500)

몇 달 후 은을 진상하자 

왕은 그 대가(代價)로 
면포 1천 1백 필을 하사했다. 

 

송 씨의 행보는 
80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중종은 송 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소선(素膳-고기를 먹지 않음)을 행했다. 

 

송 씨가 
여섯 국왕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재물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