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제10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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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춘상의 회고록

2017.01.22 19:58

원방현 조회 수:211

이춘상의 회고록

 

불안과 적막 속에서 허덕이던 나에게 많은 고교동창들이 하나 둘 찾아온다.

평소에 나를 아껴주고 염려해 주던 다정한 친구들이지만 얼굴과 이름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이 곳을 떠나! 보안사에서 너를 체포하러

오고 있다."

고 누군가가 다급하게 나에게 소리친다.

 

박원훈이가 쪽지를 전해 왔다는 것이다. 가장 나와 자주 만났던 이규달,

조응혁, 김주현, 최종백이 아니고 동창회장인 이현구도 아닌 박원훈 학형이라는

것이다. 나는 원훈이와는 유감스럽게도 커피 한 잔 나눈 적도 없다.

 

원훈이는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최고의 영재 이었지만 나는 그저 평범한

존재였으니 어쩌면 그는 내 이름 석 자도 기억 못할지도 모른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용산고등학교 재직 시 역사수업시간에서 유신헌법에 관한 제자들의 질문에

응답한 나의 눈치 없는 강의를 듣고

 

"선생님! 저기 보이는 저 남산에서 선생님을 오라고 하면 어쩌려고요? "

라고 근심어린 질문을 하던 이름 모를 제자가 떠오른다.

그러한 사실을 중앙정보부에서 알고 나를 체포하러 오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10.26. 직후 국사범(역적)으로 체포되어 보안사에서 참혹한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은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할 비운의 박흥주군의 집을 교육 공무원

신분으로 아무도 모르게 겁 없이 찾아갔었던 그 때, 그의 자당님과 그의 부인

김00여사를 위로하고 온 사실이 노출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까마득한 옛날

추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사실 그 때에 승용차도 들어 갈 수 없었던 그의 초라한 집을 나서면서 나는

흥주 그 놈을 수 없이 원망했다.

"망할 자식! 못난 놈! 그만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연로하신 홀 어머님을 위한

집 한 칸 마련 못 하였다니“

.

다시 꿈은 계속된다. 그런데 친구들이 떠나려고 한다. 친구들만이 아니라 노인과

애들이, 그리고 남녀들이 웅성거린다.

 

나는 " 밥이 거의 다 되어가니 식사나 하고 가라."고 소리친다. 소리는 점점

높아져 비명에 가까운 쉰 목소리로 변질되고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벽을 바라보니 고장 안 난 벽시계는 12월 9일 오후 5시(미국 시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나는, 나를 아껴주었던 친구들에게 암울했던 지난날의 나의 자화상을

꾸밈없이 진솔하게 보여주려고 한다.

 

고생고생하시며 나를 대학까지 졸업하게 하신 아버님과 단 돈 1원을 10.000원처럼

끔찍이 여기시며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어 나가시던 어머님의 한없는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6.25 전쟁 시 죽음의 대명사로 불리던 K. L. O라는 부대로 자원 반, 반 강압적으로

끌리어 가더니 끝내 돌아 올 줄 모르고 있는 15살도 안 된 큰 아들의 무사귀가를

신령님께 정성껏 비시며 새벽이면 비좁은 장독대 위에 정화수 한 그릇을 떠 놓으시고

10년 동안 지성으로 치성을 드리시던 어머님의 애절한 흐느낌이 내 가슴을 때린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눈가에는 이슬방울이 넘쳐흐른다.

 

그런가 하면, 전란 통에 복학을 못하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귀뺨을 무섭게 때리는

겨울 밤 늦게까지 <동아일보>를 외치며 정신없이 뛰다가 달려오는 군 트럭에 깔릴

뻔했던 쓰라린 장면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비에 젖어 팔 수 없는 신문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신문팔이를 하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새벽부터 아현동 집에서부터 세검정까지 걸어가서 어께에 짊어지고 온 능금을 파는

나의 구겨진 모습들도 빠르게 스쳐간다. 그리고 전시이기 때문에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 된 강원도의 깊은 산골에 위치한 미군부대까지 억척스럽게 찾아가서

군복세탁과 shoes shine boy 생활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와중에

불량소년으로 오인되어 경찰에게 체포되어 춘천 경찰서 유도 연무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던 쓰라린 추억도 있었다면 동창들은 믿을 수 있을까?

 

자랑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지나간 나의

자화상을 나는 처음으로 털어 놓는다.

 

나는 경기도 화성군 송산면 고정리라는 곳에서 6남매중 4번째로 태어났다. 1938년

가을에 세상에 나왔으나 극도의 영양실조로 비비 말라비틀어진 멸치 같은 내 꼬락서니를

살펴보고 조부께서는 사람 구실하기는 틀렸다 판단하시고 출생신고도 하지 않으셨다.

 

1년이 넘도록 명을 이어가자 비로소 나는 1939년 음력 9월에 출생신고를 하게 되었다.

한 때는 마을에서 유일한 기와집으로 소문났던 가문은 그 많은 농지를 잃고 빈 털털이가

되어 고향을 버리고 전연 연고도 없는 낯선 서울의 유랑가족으로 전락되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고이 간직하던 모든 놋그릇들을 일본 놈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밤중에 땅을

파고 숨기었던 기억도 생각난다.

 

1945년 8월 마침내 일제가 망하고 민족해방이 되었으나 기쁨도 잠시,  5년 후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일어난 6.25전쟁으로 민족의 최대비극은 시작되었다.

 

학교를 중단한 나의 형과 나는 어린 동생까지 동원하며 밥 벌기에 나섰다. 비좁은 13평의

단 칸 방에서 7식구가 엉키어 살아가던 나에게 행운이 따라왔다. 1951년 2학기가 시작되며

운 좋게 나는 종합국민학교 6학년으로 복학할 수 있었다.

 

시간에 쫓기던 나는 남이 부러워하는 중학교에 우리 학급에서는 유일하게 나만 들어가는

행운이 따랐지만 모든 여건이 어려운 형편에서 나는 새로운 갈등에 시달리어야만 했다.

가정형편상 고교 중퇴와 고등학교검정고시를 한 때 고려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던 과정에서

나에게 드디어 묘안이 떠올랐다.

 

돈이 많이 드는 사비가 아닌, 국비로 공정하게 경쟁하며 정규 사관학교를 졸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진국의 미래는 군부의 힘에 달려있다는 .세계사의 흐름도 있기에 나는 여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

 

당시에는 육사모집 사항에 .잇과반만 선발하였다. 문과체질인 나는 싫어하는 물리, 화학과

싸우며 입시를 마주했다 .자신 만만했던 1차 관문인 신체검사에서, 앞뒤로 마주앉아 공부하던

박흥주와 나는 똑같이 축농증이란 낙인을 받게 되었다. 수도육군병원의 오진을 확신한 나는

다음 날 재검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단정하며 나와의 동행을 강력히 반대하던 흥주를

설득하고 재검을 받으러 갔다.

 

그렇게도 자신만만하던 나는 급성축농증으로 확인되었고 마지못해 끌리어 갔던 흥주는

오진을 정정 받고 당당히 육사에 합격하게 되었으니 인간의 운명이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까?

 

졸지에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나는 이과에 소모하던 노력과 시간을 내던지고 내 적성에

맞는 문과에 응시해 보기로 작정하였다. 어렸을 때의 꿈은 검사였으나 가정형편을 고려해

등록비가 가장 적고 장학금도 나오고 졸업 후 취업률이 가장 좋다는 사대를 지원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이미 3국지 소설을 여러 번 통독한 나는 역사의 매력에 빠져버려 결국

역사교사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한 때는 대학원 진학도 생각하였으나 쉽고 편하게

사는 방법을 택한 것은 너무도 아쉬운 일이다.

 

1960년 역사적인 4.19 학생혁명의 물결 속에 사대학생들도 통의동 파출소를 지나 경무대

앞 까지 진출하였으나 경찰의 무차별 실탄 사격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대오는

산산이 흩어져 나는 그 날 종로 5가에 있는 동창 한영교군의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때 마침 일어난 학보병 자진 입대라는 유행 속에 나는 3학년을 마치고1961년 4월 1일

논산 훈련소로 달리는 군용열차에 몸을 맡기었다. 1년 6 개월이라는 단기 복무의 대가는

너무도 참혹한 것이기에 설명을 생략한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나는 아무런 사명감도 없이 고등학교 교사의 길을 걸어갔지만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

는 경희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였다.

 

축구의 명문 동북고등학교에서 교단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단의 부실경영과 신임 교장의

부정한 방침에 반대하던 중에, 때 마침 있었던 시 교육청의 중등교사 채용시험에 응시하여

교육공무원으로 새로운 출발을 해서 성동중학교를 거쳐 용산고등학교에 부임하게 되었다.

.

겨울공화국이란 표현처럼 암울했던 유신시절 새로 부임한 K교장은 학부형들로부터 부당한

성금(?)을 모금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고교2학년 전학생들에게 겨울방학기간에 전교과목의 과외수업을 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은

대학입학 자격취득을 위한 예비고사만을 위한 겻으로 대학입학과는 전혀 필요치 않은

과외수업이니 세칭 일류대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는 너무나 황당한 명령이다.

뿐만 아니라 일체의 과외수업이나 불법잡부금 징수를 엄벌하겠다고 하는 문교정책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사들은 교장과 교감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학교장의 직권남용은 양 같은

교사들에게는 그들의 앞길을 좌우할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기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겻이다. 일부 몰지각한 교사들은 그들의 출세를 위해 온갖 추태를

부리고 있다.

 

그러한 망국적인 풍조는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왔고, 그것은 혈연, 지연과 학연이란

인맥과 호응하며 오늘의 현직 대통령 탄핵이란 엄청난 사태까지 몰고 온 것이다.

 

각설하고 반골의 어리석은 교사는 K교장의 부당한 지시에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나 그의

존엄성을 훼손하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문제교사로 날조되어 항변할 여유도 없이

다음 해 봄 정기인사이동에서 머나먼 다른 학교로 좌천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부당한 교장의 인사조치에 대응해 행정소송을 하려는 분노와 자존심을 억제하고 조심스럽게

지각이나 결근 한 변 없이 근무하던 경동고등학교에서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비운을

마지하게 된다.

 

1년이 거의 다 지난 2월 말, 교체되어 온 백발의 P교장은 당연히 이동대상인 5년이 지난

같은 고향 후배인 K교사의 편의를 도와주기 위해 1년이 막 지난 나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원거리 내신>이란 서류를 날조해 누구나 좌천으로 생각하는 빈촌지역인 관악고등학교로

내 몰았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인데 이것은 희극이 아닌가?

 

인내는 무엇이고 노년존중이란 무엇이며 직장 상사란 무엇이란 것인가!

 

분노를 참지 못한 나는 당시 K. B. S.보도실장으로 있던 강용식 학형을 찾아갔다. 사정을

대충 설명하고 앞으로 언론투쟁을 할 생각이니 그 때 공정한 보도가 나오도록 부탁하고

돌아서는 내 모습을 보며 강형은 우려와 함께 격려를 해 주었다. 얼마 후 ,나는 당시

노량진에 살고 있던 최종백 판사를 늦은 밤에 갑자기 찾아가 녹음기를 빌려왔다

 

다음 날 아침, 경동고등학교 2월 말 종업식이 끝나고 마지막 직원회의가 거의 끝 날 무렵

나는 비장된 녹음기와 마이크를 작동시키고 신상발언을 시작하였다. 반골교사가 새로운

무기를 들고 나오는 이변에 압도되었기 때문일까? 숨소리도 안 들린다.

 

<P교장의 부당한 인사조치는 내 개인적 인권유린이 아니라 전체적 교권 침해이며 정부의

부정 쇄신정책에도 역행하는 직권남용의 폭거> 라는 요지와 함께 < 내 개인의 교직을

던져버리고 교권확립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할 것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약한 겻이 인간의 속성이던가? 그 날 늦게까지 나를 애타게

기다리며 정중한 사과를 하는 노장들의 모습을 외면할 수 는 없었다.

 

1985넌 가을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미국 이민 길에 오른 나는 화곡동의 작은 집을

정리하고 남은 몇 푼 안 되는 돈을 가지고는 구멍가게도 차릴 수 없었던 딱한 나의 사정을

알고 찾아온 박희정 학형(현 Orange County 10수회장)의 도움으로 청소회사의 환경미화원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1개월 만에 우리는 그 일을 포기하고 새로운 도전을 하여야만했다. 우리는 시간이

바로 돈이 되는 이민 사회에서 요령을 부릴 줄 모르기에 시간만 낭비하고 있으니 최소한의

생활도 유지할 수 없었다.

 

새로운 도전이란 옛 날 남대문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노점상이다. 돈도 기술도 체력마저

없는 우리는 말도 통하지 않는 낯 선 이국땅에서 Yes , No와 Thank You라는 단어만 가지고

노점을 차리기로 하고 깡통 Van을 사기로 결정하였으나 Down Pay할 5천불도 없는 우리는

선배 형님으로 부터 돈을 빌리고 Chevy Van 회사를 찾아갔으나 Credit이 없으니 Co Sign을

받아 가지고 오라는 것이다.

 

만만한 것이 동창이라 박순하 학형에게 부탁하여 마침내 차를 빼내고 LA 잡화도매상을

찾아다니며 차에 물건을 가득히 싣고 장사가 될 만한 장소를 찾았으나, 라이선스가 없다고

쫓겨 다니기에 바빴다.

 

장사가 될 만한 번화한 거리에서는 허가증을 낼 수 없어 한가롭고 빈한한 거리로 자꾸만

밀려났다. 중동계 미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Liquor 앞에 작은 면적을 매일 10불씩 내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엄청난 강풍이 부는 날에도 우리 부부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해 나갔다.

 

그리운 형제와 다정했던 친구들이 있는 고국을 등지고 머나먼 이곳 까지 와서 이 짓을

하려고 왔나 하는 자책감에 스스로를 통제 못하더니 극도의 정신적 충격으로 남들이 부러워하던

기억력마저 잃고 말았다.

 

세월은 흘러 노점생활 5년 후, 나는 90%가 Black American인 변두리 빈촌에 싸구려 잡화상을

꾸리기 위해 난방시설도 없는 가게를 Rent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서투른 톱과 망치와 싸우기를

10여일만에 나는 잡화상 사장이 되었다

 

종업원도 없이 넓은 가게를 나 혼자 지키고 있던 어느 날 10대의 남녀 혼성 떼도둑 10여명이

한꺼번에 몰려와 물건들을 마구 집어가는 상품 이동작업이 자행되고 있었지만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또 어느 날에는 칼을 가슴에 대며 현금을 강요하는 백인 강도와 이십여 분 간 대치하는 위기를

마지하기도 하였다.

 

무덥던 여름 어느 날 에어컨도 없는 가게로 희정이가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다. 넓은 가게를

휘둘러보고 나가는 그는 쓴 소리를 남기고 떠나갔다.

 

“머지않아 문을 닫게 될 가게는 쓰레기만 남겠구나.”

그의 말대로 3년을 버티지 못하고 어렵게 만든 가게를 포기하고 나는 Swap meet이란 돛대기

시장으로 들어갔으나 때 늦은 막 차를 탄 것이다. 장사할 능력도 자금도 없던 나에게 장사란

투자한 만큼 이윤이 비래한다는 뼈저린 가르침을 준 셈이다.

 

이민생활 15년 만에 조그만 내 집을 마련하고 은퇴(?)한 것은 만 70을 넘긴2000년이고 나의

거주지역 주소를 찾아보니 15개나 되었다.

 

숨 가빴던 이민생활도 어느덧 30년이 흘러갔다, 어렵게 자랐던 어린 시절도, 평탄하지 않던

교단생활도 그랬지만 가장 어려웠던 이민 초기의 험한 시기를 넘게 해 주신 하늘에 감사드리며,

아울러 함께 고생해 준 아내와 어려운 부모를 위해 도와준 두 딸과 아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또 하나 빼 놀 수 없는 것은 나와 비슷한 멍청이가 내 옆에 있다는 겻이다, 그의 이름은 이명선이다.

바보와 멍청이는 본래 같은 뿌리에서 자랐다고 한다. 사실 고교시절 명선이와 나는 한 번도 같은

반에 있은 적도 없었고 말 한마디 할 기회도 없었다.

 

가게를 한답시고 밤낮으로 정신없이 뛰던 20년 동안 동창들과 연락을 끊고 지내왔으니 거의 50년

만에 Orange County 박순하 사무실에서 명선이를 알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명선이는 MP3라는 전자 제품에 무려 5시간을 소모하며 1500여곡의 음악을 손수 취입하여

나에게 선물했다. 그러나 나는 그 소중한 귀중품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실수로 사우나탕에 빠트려

못쓰게 만들기도 하였지만 명선이는 그 때 마다 다시 만들어다 주는 것이다. 그 덕으로 나는

음치협회로 부터 퇴출당하기도 하였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80을 눈앞에 두고 있다. 죽음의 문 턱 바로 앞에 까지 갔다가 운 좋게 살아

온 것이 무려 5번이나 기억된다. 장수하는 것이 축복이 아니지만 쉽게 죽지도 않을 겻 같다.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지난 4월 .어느 날 서울에 있는 아우에게서(고교3년 후배) 참으로 믿지 못할 소식이 날아왔다.

앞서 설명한 K. L. O 특수부대로 끌려가 소식이 없던 형의 소식이 국방부에서 담당자가 직접

찾아와서 통보해 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법무관으로 있던 최종백 대위가 수차례 국방부에 알아보려고 노력했으나 모르쇠로

일관되어오다가 이미 10여 년 전에 하늘나라에 올라가신 부모님은 물론 살아남은 우리

3남매와 이미 세상을 떠난 누님의 두 조카와 막내 여동생의 두 조카들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 되살아난 것이다.

 

1951년 12월에 끌리어나가 <1953년 1월26일 중부전선에서 전사> 라는 통보를 국방부

특수임무수행 보상심의 위원회 담당자가 직접 집으로 찾아와 전한 겻이 2016년 4월 14일

이니 실로 65년 만에 극적으로 나타난 사실이다.

 

그 후 2016년 6월25일 국방부에서 형의 마지막 군복을 입은 영정 사진을 보내며

합동위령탑이 경부고속도로상의 판교부근에 세워 졌고 앞으로 대전 현충사에 이름과

영정 사진이 안장 될 것이나, 호적상의 생년월일과 특수 피교육자의 생년월일이 달라

보상 심의가 늦어질 것이라는 것이 마지막 통보였다.

 

그 후 거의 7개월이 지난 오늘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고국정세가 저 꼴이니

한 개인의 작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첫째로 모르쇠로 일관하던 정부가 65년 지난 후에야 정확한 전사 날짜를 어떻게,

언제 알게 되었나? 하는 의문이고

 

두 번째로는 특수 피교육자의 생년월일과 호적등본의 생년월일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다.

 

추측컨대 피교육자의 생년월일이 호적상의 그 것보다 더 빠르게 기록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참으로 개탄할 국가적 범죄행위다.

 

나이 어린 미성년자를 부모도 모르게 빼돌리어 강압적으로 주검의 길로 끌고 갔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이라면 부모도 모두 잃고 천애고아가 된 가련한 어린 청소년들의

생년월일이 날조되어 주검의 길로 몰아간 것은 더욱 가능한 일이다.

 

K. L. O.부대 운영에 대한 모든 경제적 부담은 미8군이 지고 그들의 훈련은 한국공군이

담당 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라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특수부대에 대한 규모나 희생자의

숫자 등에 대한 상세한 기록도 국방부가 밝혀야 할 일이며, 70년대에 일어났던 충격적인

실미도 사건에 대한 국방부의 명확한 설명도 들어본 적이 없다.

.

고국의 정치혼란은 국회를 떠나 대통령 탄핵의 Key는 헌법재판소로 넘어간 지도 여러 날이

되었다.

 

헌재의 명확한 판단을 내리기를 바란다.

촛불시위가 대다수 국민의 뜻인지, 태극기를 앞세운 보수 세력의 주장이 참다운 민의인가를

심도 있게 생각해야 할 난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양쪽 모두가 충분히 그들의 의사를

전달하였으니 조용히 헌재의 최종 결정을 기다려야 할 때이다.

 

<진인사대천명>이란 말이 가슴에 다가 온다.

 

병신년은 그 이름 그대로 우리 사회를 총체적으로 짓밟아 놓고 역사의 뒤로 도망쳤고

이제는 희망의 정유년을 맞이했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묵은해를 버리고 밝은 신년을

맞이해 동창들의 건강과 가정에 항상 행운이 깃들기를 기도한다. 아 멘

.

2017년 1월21일

남가주에서 황야 이춘상 드림

 

추신: 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서전 같이 되어버렸다.

지루한 졸필을 끝까지 읽어주신 인내를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