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제10회 동창회

한국어

글모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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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평양에

열여섯 살에 과부가 된 여인이 있었어요.

이 처자는

1848년 평양의 이름 없는 촌부

백지용의 맏딸로 태어났지요.

 

백지용은 아들을 기대했는데 딸을 낳자

실망하여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어요.

 

그런 소녀 백씨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홀어머니 손에 자라

 

열네 살에

안 씨 문중으로 시집을 갔어요.

 

시집간 지 2년 만에 병약했던 남편이 죽자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고 시집에서 쫓겨났지요.

 

친정으로 돌아온 16살 소녀 백씨는

친정엄마와 함께 쌍과부가 되었어요.

 

그로부터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열심히 돈을 모았는데

 

그가 26살 되던 해

친정엄마 마저 세상을 떠나갔지요.

 

“너는 똑똑한데 내가 가르치지 못한 것이 한이다 ”

라는 말을 남기고 …….

 

그때 친정엄마가 물려준 것은

현금 천여 냥과 백오십 냥짜리 집한 채가 전부 이었지요.

 

그러나 집안 어른들이 몰려와

부모 제사를 모시려면 아들이 없으니

양자를 들여야 한다고 해서

 

집안 어른들의 뜻대로 사촌오빠를 양자로 들였는데

이 오빠가 전 재산을 빼앗아 가 버렸어요.

 

그래서 스물여섯 살에 빈털터리가 된 백 과부는

다시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았지요.

 

이때부터 환갑 때 까지

"평양의 백과부"로 불렸지요

 

삯바느질에 길쌈은 물론이고

이십 리나 떨어진 시장에 가서 음식 찌꺼기를 모아와

돼지를 길렀으며

 

남들이 먹다버린 봉숭아 씨를 모아 시장에 내다팔고

콩나물 장사도 했으며

돈벌이가 되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지요

 

이런 백 과부를 두고 사람들은

“악바리 백 과부, 지독한 백 과부”라 불렀어요.

 

때로는 홀아비들이 찾아와

같이 살자고 우격다짐으로 데려 갈려고도 했고

또 아직 나이 젊은데

첩실자리가 있으니 팔자 고치라는 회유도 많이 받았지요.

 

그리고 시정잡배들에게 끌려가

치도곤도 많이 당했어요.

 

그러나 백 과부는 꿋꿋하게 열심히 일하고

언제나 바르게 살았으며 남의 궂은일에는

제일 먼저 달려가 일손을 거들었지요.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들이 백 과부를 좋아했고

백과부가 하는 일은 모두 도와주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백과부가 꽤나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을 듣고

탐관오리 평양 부윤이

그를 불러 재산을 바칠 것을 강요했지요.

 

그러나 백 과부는

죽으면 죽었지 이유 없는 재산은 못 내놓는다고 버티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와

생사람 잡지 말라고 상소를 하며

동헌마당을 떠나지 않았지요.

 

탐관오리 평양부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풀어 주었어요.

 

그렇게 번 돈으로 백 과부는 땅을 샀어요.

그리고 그 땅을 소작농에게

싼값으로 대여해주고 소작료를 받아

다시 다른 땅을 사들이는 것을 반복하면서

재산을 크게 늘리게 되었지요.

 

당시 돈 있는 사람들은

고리대를 이용해서 쉽게 재산을 늘렸지만

백 과부는 그렇지 않았어요

 

옛 말에

덕을 베풀면 복이 온다 했던가요?

 

그동안 많은 덕을 베푼 백 과부에게도

복이 찾아 왔어요.

 

지금까지 악착같이 벌어온 돈을

10배로 늘릴 기회가 찾아온 것이지요.

 

백 과부는 일본에서 건물을 지을 때

시멘트로 짖는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일본 놈이 가지고 있던

대동강 근처에 있는 만달산을 싼값에 구입 했어요

 

만달산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산이지만

몽땅 석회석으로 이루어져 있었지요.

 

이 일이 그녀에게 큰 행운이 되었어요.

 

얼마 후 시멘트가 대대적으로 필요하게 되면서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석이 가득한 만달 산을

일본인 시멘트업자에게 10배가 넘는 가격으로 되팔았지요.

 

그렇게 부자가 된 백 과부는

1908년 환갑을 맞아

대동군 고평면 고향에 커다란 다리 하나를 놓았어요.

 

이 동네는

마을 중앙으로 큰 냇가가 있어

평소에도 물이 많아 잘 건너지를 못했는데

 

이곳에 큰 다리를 놓으니

마을에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었지요.

 

마을 사람들이 백과부를 크게 칭송하자

 

“돈이란 아무리 아까워도

써야 할 곳엔 꼭 써야 하지요” 란 말만 했다 하지요

 

사람들은 이때부터

“백과부”를 “백선행”이라 불렀어요.

 

그리고 그 "선행"은

이름도 없던 백과부의 이름이 되었지요.

 

그 뒤에도 백선행은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많은 사재를 털어 교회를 짓고

 

또 배우지 못한 어머니의 한이면서

자신의 한이었던 학교를 세우고

또 장학 재단을 설립했어요.

 

당시 평양에 있는 거의 모든 학교가

백선행의 기부금으로 운영될 정도였다고 하네요.

 

또 독립운동가 고당 조만식 선생이

평양에 조선인을 위한 공회당과 도서관을 건축하자고 하자

현재 가치로 150억 원 상당의

공사비와 운영자금을 제공했어요.

 

그래서 이때 지어진 공회당이

지금의 <백선행 기념관>이 되었다 하네요.

 

1933년 5월 여든여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

35만원(현재가치350억 원)의 재산은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지요.

 

한국 여성으로서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진 백선행의 장례식에는

1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으며

수백수천명이 상복을 입고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어요.

 

300개가 넘는 화한과 만장 등이 늘어선 장례행렬은

2km나 이어졌지요.

 

당시 평양시민의 3분의 2인

10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평양 백과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하네요.

 

열여섯 앳된 나이에 과부가 되어

수절한 그녀에게 자식은 없었지만

그녀를 어머니로 섬기는 청년은 수백수천을 헤아렸고

평양시 전체가 그를 애도했다 하지요

 

백선행은

돈이 얼마나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지를 알려준

최초의 부자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