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제10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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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첫사랑 / 김 영 덕

ydkim 2018.08.01 21:23 조회 수 : 140

수필

 

 

                                 첫사랑

 

                                                                     김 영 덕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일은 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는 것처럼 당연한 자연의 섭리다. 첫사랑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과연 맞는 말일까 하고 상념에 잠겨본다. ‘지나간 일들은 모두 아름답다’라는 영국의 격언이 있기도 하지만, 학창시절 때의 연애 특히 첫사랑의 추억은 그저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법대생이라면 으레 처음부터 고시공부에만 매달리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학년 시절에는 교양학부 과정을 이수하면서 폭넓은 지식과 인생경험을 쌓으며 자유분방한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낸다. 나도 1학년 때, 타 대학의 남녀 여러 동급생들과 함께 동아리를 만들어 활발한 과외활동을 하였다.

 

친한 친구 7명이 주축이 되어 대학에 갓 입학한 학생들만이 중심이 된 동아리를 만들었다. 심우心友회, ‘마음의 벗’이라는 이름의 모임이다. 심우회는 한 달에 2번 모임을 갖고,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토론도 하고 취미생활의 나눔을 통하여 우정을 돈독히 하였다. 우리 발기인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후배 회원들은 계속 이 모임을 이끌어갔다. 선배회원도 가끔 초청하여, 참석하는 길고도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이어나갔다.

 

기억에 남아 있는 토론 제목 중 하나는 ‘이성간의 우정은 지속 가능한가?’인데 막상막하의 열띤 공방으로도 결론 짓지 못하고 폐회했었다. 심우회에서 이성간의 우정을 쌓다가 사회에 나온 후 부부의 결실을 맺은 남여 회원도 있으니 이성간의 우정은 옅어지거나 사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임을 시작한 지 6개월, 신입생이었던 창립 멤버가 2학년이 되었을 때 한 여자회원의 추천으로 E여자대학교의 신입생 여자회원 한 명이 입회하였다. 첫인상이 좋은 그녀는 나의 허전한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얼굴은 늘 맑기만 했으며 동아리에 나갈 때마다 야릇한 이성의 느낌이 강렬하게 풍기는 인상이었다. 그녀를 보고나면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만큼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아 빨갛게 잘 익혀진 능금과 같았다.

 

심우회 정기모임 외 우리는 주말을 이용하여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하였다. 헤어지면 보고 싶고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이것이 첫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적한 남산길도 걸었고, 영화관과 음악 감상실, 고궁과 전시회도 다니곤 하였다.

 

흰 눈 내리던 크리스마스 새벽에는 몇몇 심우회 회원들과 함께 그녀의 집앞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캐럴도 불러주었다. 그녀는 부끄러워 나와 보지는 못하고 창문으로만 우리를 반겼다. 연애하는 동안, 수줍음인지 창피의 걱정인지 손 한번 못 잡아본 순수한 데이트였다. 현재의 통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데이트를 하였다. 여러가지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한 선물들도 많이 주고받았다.

 

나의 행적을 눈치채셨는지, 부모님께서 집에 한 번 데려와 보라 하셨다. 부모님께서는 키도 작고 나이가 한 살밖에 차이나지 않으니 결혼상대로는 부적절하다는 말씀이었다. 또 더 좋은 규수감들이 많으니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보라 하셨다.

 

연애한지 1년 반, 3학년 2학기가 되니 졸업 후 장래에 대한 근심과 조바심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나아가서 유학을 계획하고 있는 나에게는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가 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많은 동급생들은 고등고시 및 취직시험을 준비한다고 도서관으로, 혹은 절로 들어가니 나의 안일한 사고방식에 강한 경종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나도 마음을 가다듬고 시험 준비에 매진하기 위해서는 서울을 떠나 조용한 산사(山寺)에서 공부와 심신수련이 급선무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진로와 그녀의 장래를 위하여서도, 우리의 냉정한 관계 정리가 바람직하다고 느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기적인 이율배반의 사고였는지도 모르겠으나 그 당시 여건에서는 헤어짐이 서로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여겼다.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이별의 결단은 몇 주간의 고뇌 끝에 나온 것이였다.

 

196010월의 마지막 주일 오후, 충무로 태극당에서 우리는 만났다. 처음에는 말문이 막혀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몇 주를 고민하다가 서로를 위하여 헤어짐이 좋겠다는 이별을 고할 때 오히려 담담해지는 내 심정은 어찌 된 일인가……. 그녀도 나의 결정을 서글픈 눈빛으로, 의아함과 이해함 반반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우리의 좋은 추억을 간직한 채 뒤 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잘 살아봅시다” 라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우리는 태극당을 나왔다. 저녁 노을도 이별을 슬퍼 아쉬워하는 듯 붉게 물들어 하늘을 색칠하고 있었다.

 

며칠 후, 나는 같은 과의 친구와 함께 서울 근처의 용문사로 책 보따리 싸들고 입산하였다. 몇 달간 공부하며 수도하기로 마음 먹고 집을 떠났다. 그녀와의 추억도 잊어버릴 겸…. 얼마 동안은 마음 가다듬는 데 애를 먹었으며 그저 허전하고 참담한 심정이었다. 서울에 있었더라면 다시 그녀를 만났을 것이다. 친한 심우회 회원을 통하여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녀는 등교도 못하고 몇 주간 돈암동 집에서 앓아누워 있었다고 했다.

 

그 후, 나는 졸업과 군 제대 후 은행에서 1년간 일한 뒤 미국으로 유학 왔다. 이곳에 살면서도 나의 마음 아팠던 추억과 함께 가끔 그녀의 생각이 떠오르곤 하였다. 첫사랑은 아름답고 못 잊는가 보다는 독백과 함께….

 

몇 해전, 서울에 혼자 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나의 첫사랑을 만나보고 싶은 야릇한 호기심과 충동심이 일어남은 웬일인가! 내 고등학교 동기 부인이 그녀와 같은 K여자고등학교 동기생이어서 우리의 재회는 쉽게 이루어졌다. 약속한 날까지 며칠간, 여러가지 상상의 날개가 나를 설레고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간 그녀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가족은 몇이고, 어찌 변했을까, 내 생각도 했을까, 등등…. 떨리고 긴장된 심정으로, 워커힐 커피숍으로 나갔다.

 

40여년 만의 극적인 상봉이었다. 그녀의 젊고 아름다웠던 몸매, 예뻤던 얼굴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영락없는 60대 할머니의 모습이 아닌가! 나도 늙었건만 젊은 날의 기억만 떠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강산도 네 번 이상 변했을 긴 세월동안의 각자 인생살이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듣고 이야기하였다. 재회의 실망과 후회만을 뒤로 하고, 나는 로스앤젤레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워하던 첫사랑은 만나지 말고 추억으로 내 가슴에 묻어둘 것을 하는 아쉬움만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