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제10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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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석의 [정신건강에세이]

'채색조' (색칠한 새) /정유석

2008.12.25 16:30

정유석 조회 수:4652

미국에 와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다시 밟던 처음 몇 년간은 참으로 어렵던 시절이었다. 언어장벽으로 인한 고통이야 누구나 겪는 바이지만 미국 의사들과 같은 봉급을 받는 대신 의무나 책임은 병원에 근무를 시작한 첫날부터 똑같이 져야 했다. 가까스로 수련을 마친 후 개업을 해서 안주하기까지 또 2,3년이 더 걸렸다. 그 사이 "독서"란 통틀어 미국신문 하나, 한국 신문 하나, 두어가지 시사 잡지가 전부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은 흘러 저만치 앞서 가 있는데 나 혼자만 뒤에 쳐진 듯한 기분에 싸였다. 그 길로 책방에 가서 눈에 뜨이는 대로 책 몇 권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그때 발견한 것이 "채색조"(彩色鳥,The Painted Bird)란 소설이었다.
저지 코진스키(Jerzy Kosinski)란 폴랜드 태생 유태계 미국 작가가 나치스 점령하의 홀로코스트 그리고 쏘련 군에 의한 해방기에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해서 지은 성장 소설이었다. 이 책은 30여 개 나라에서 번역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품이다.
전쟁이 터지자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아이의 생명을 구하려고 부모가 시골에 맡긴 6세의 소년은 보모가 사망하고 집까지 불 타 없어지자 혼자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방황한다. 이 소년의 눈에 비친 세계는 끝없는 박해, 치상, 살해, 강간, 수간, 근친상간 같은 충격적인 폭력과 공포로 가득 차 있다. 약자에 대한 만행은 나치스만이 아니라 폴랜드 시골 사람들에 의해서도 거침없이 자행된다.
자기 아내의 젖가슴을 훔쳐보았다고 해서 질투에 쌓인 방앗간 주인은 14살 난 소년의 머리채를 잡고 숟가락으로 눈을 찔러 눈알을 후려낸다.
동네 아이들은 무리를 지어 유태나 집시 계통 아이들을 잡아 얼은 호수 속으로 밀어 넣는다. 소년의 눈에 인간의 행동이 동물과 다름이 없다. 심지어 곡마단 여배우가 말과 성교를 하는 둥, 성행위에서조차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지 않는다.
교회도 안식을 주지 않는다. 잠시 성당에서 복사를 일을 하다가 실수로 인해 손에 든 성경을 떨어트리자 교인들은 소년에게 마귀가 씌웠다고 저주를 하며 쫓아낸다.
나중에 적군이 마을을 해방했을 때, 소년은 다소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당 간부라고 해서 무고하게 양민을 죽이고도 면책이 되는 둥, 폭력과 비이성적인 차별은 계속된다.
한 동네에서 소년은 새 장수를 만난다. 이 남자는 애인을 잃고 상심하여 새 날개를 색칠은 한 후 날려보낸다. 색칠된 새는 원래 자신이 속해 있던 무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새 무리는 색칠된 새를 공격한다. 새가 자신이 무리에 속했다고 생각해서 다가가면 갈수록 새 무리들을 더욱 심하게 쫓아내고 만다.
사람의 정이 그리워서 이 동네 저 동네로 떠돌아도 번번이 인간의 잔혹함을 맛보아야 하는 이 소년이 바로 색칠된 새인 것이다.
전쟁이 끝나 11살이 된 소년이 부모의 품에 안기지만 이제 그는 이미 소년이 아니었으며 처음으로 만난 동생의 팔을 비틀어 부러지게 하는 포악함이 어느새 몸에 배어 있었다.
이 책을 읽을 때가 70년도 중반이었다. 마침 그 당시 미국에서는 월남전 후유증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란 질병의 개념이 정신과에 등장하고 있었다. 그때 필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어린 나이에 받은 심리적 외상이 너무 심해서 아마도 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저자 코진스키는 "색칠된 새" 후로 "Steps", "Being There" 작품으로 상을 받고 작품이 영화화되어 무척 유명해 졌다. 스스로 영화에 출연하기도했으며 국제 PEN 클럽 회장도 역임했다.
그는 1991년 58세의 나이로 자살하고 말았다. 홀로코스트를 몸소 체험했다가 나중에 자살한 작가가 여러 명 알려져 있다. 그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 필자는 마치 어렴풋이 나마 기대했던 일이 사실로 나타났을 때 느끼는 아련하게 다가오는 서글픈 마음을 한동안 떨쳐 버릴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