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제10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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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석의 [정신건강에세이]

고호의 황색시증 원인 II -산토닌

2009.01.06 17:38

정유석 조회 수:5522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기로 알려진 작가 오정희씨의 소설 ‘중국인 거리’의 한 장면이다.
“삼거리의 미장원을 지날 때 치옥이가 노오란 소리로 말했다.
회충약을 먹은 날이니 아침은 굶고 와야 한다는 선생의 지시대로 치옥이도 나도 빈속이었다.
공복 감 때문일까. 산토닌을 먹었기 때문일까. 해안을 꿈꾸는 냄새 때문일까. 햇빛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치마 밑으로 펄떡이며 기어드는 차가운 봄바람도 모두 노오랬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기생충의 왕국이었다.
60년에 조사한 통계에서 전 국민의 95%인가 또는 98%인가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아도 하여간 전 국민의 대부분은 몇 가지의 기생충을 몸에 지니고 살았다.
그 중에서도 사람이 먹는 음식물에서 영양분을 취한다고 알려진 회충이 가장 큰 문제였다.
회충이 많은 아이들은 가끔씩 횟배를 앓았고 심한 경우 회충이 엉켜 야구공보다 더 큰 덩어리를 지어 장을 막을 때면 수술로 제거해야 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학교에 다닐 때 전 학생들이 산토닌을 먹는 날이 있었다.
그런 다음날이면 산토닌에 취한 회충들이 장에 붙어있지 못하고 대변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 산토닌의 부작용으로 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황색시증이 빈번히 발생했다.
요즈음 젊은이들에게는 낯설고 미개한 외국 오지의 이야기같이 들리겠지만 그 무렵을 살았던 분들은 오정희씨가 묘사한 장면과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산토닌은 16세기부터 구충제로 널리 사용되어왔다.
이 약은 ‘소태’ (또는 ‘다북쑥’Wormwood)에서 추출한다.
맛이 어찌 쓴지 성경에조차 이 식물이 인용되고 있다.
(신명기 29:18, 잠언 5:4, 예레미아 9:15, 아모스 5:7 등)
19세기 말 파리를 중심으로 예술가들이 모여 즐겨 마시던 에메랄드 초록색 술 압상트에는 산토닌의 원료인 소태가 주성분이다.
알코올이 75%까지 되는 독주에 속한다.
압상트는 드가, 마네, 로트렉, 반 고흐의 그림에도 등장한다.
로트렉이나 고흐는 물론이려니와 시인 보들레르, 폴 베를렌, 소설가 헤밍웨이, 에드거 앨런 포, 에밀 졸라, 화가로는 피카소까지 이 술을 즐겨 마셨다.
로트렉의 경우, 이 독한 술을 물로 순화시키는 대신 꼬냑에 섞어 마셨기 때문에 ‘진짜 원조 폭탄주’라고 칭할 만 하다.
그는 이 혼합주를 ‘지진’이라고 불렀다.
시인 랭보는 이 술을 마시면 “가장 우아하고 하늘하늘한 옷” 같이 취해온다고 찬사를 표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압상트를 마시고 있던 술집의 마루 바닥에서 튤립 꽃들이 피어나는 환상을 보았다.
근래에 나온 뮤지컬 영화 ‘물랑 루즈’(2001)에서도 압상트가 미화되어 등장한다.

이 술의 주성분인 소태(Wormwood)를 남용하면 두통, 구역질, 구토, 그리고 환각과 정신병이 발생할 수 있고 두뇌에 손상이 생기는데 심하면 간질발작을 한다.
1905년에 스위스의 한 노동자가 압상트 두 잔에 취해 가족을 몰살시킨 후로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이 술이 불법화되었다.
미국에서도 금주법이 발효하기 훨씬 이전인 1912년에 이 술의 제조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압상트가 불법화 된지 오래 후에도 이 술을 마셨는데 그의 작품 ‘오후의 죽음’이나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에 압상트가 언급되어 있다.

시골에서 파리에 올라온 고흐에게 이 술을 소개한 사람은 로트렉이다.
그는 고흐가 압상트 마시는 모습을 1887년에 파스텔로 그렸다.
이 술에 맛든 고흐는 압상트 중독자가 되었고 ‘압상트 잔과 술병’(1887), ‘정물, 양파가 있는 화판’(1889)이란 유화에 그림으로 남겼다.

압상트에는 소태가 중요 첨가물인데 소태는 산토닌의 원료다.
산토닌을 복용하면 황색시증(黃色視症)이 발생하기 때문에 압상트 중독으로도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