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네스트 헤밍웨이 (1898-1961)는 20세기 미국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친 작가에 속한다.
그는 말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여 전 세계에 미국 문학의 위상을 높였다.
그의 작품은 물론 그의 생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신화처럼 알려져 왔다.
그는 아주 근엄하고 말수가 적으며 남성적이고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탐험을 추구하는 행동하는 작가란 이미지를 남겼다.
그래서 모험과 폭력, 탐험, 애정, 전쟁 그리고 죽음 등은 그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빈번히 자신의 작품세계에 반영시켰다.
그는 1898년 일리노이주 시카고 교외에 위치한 오크 파크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야외 생활에 취미가 있어서 어린 아들에게 사냥과 낚시를 가르쳐 주었다.
가족은 미시간주 베어 레이크에 별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히 여름만 되면 야외생활을 하면서 그 지역 인디언들의 생활을 구경하고 때로는 세밀하게 관찰했다.
고등학교 시절 영어를 빼고는 성적이 그리 시원치 않았다.
이때 그는 권투와 카누를 배웠으며 자기 주먹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91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6개월 동안 ‘캔저스 시티 스타’라는 신문에서 기자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마침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8년 헤밍웨이는 미주리주 방위군에 자원했다.
그러나 그가 속한 부대는 유럽 원정군에서 제외되었다.
그는 직접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무척 들떠있었다.
그런데 그가 근무하는 신문에는 유럽 전선에서 앰뷸런스 운전사가 필요하다는 적십자사의 광고가 실렸다.
그는 신문이 독자들에게 발간되기도 전에 지원서를 냈다.
그래서 그는 혼자 이탈리아에 가서 앰뷸런스 운전사로 근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개전 초기부터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직접 맛보았다.
근무 첫 날 밀라노 근교에 있는 무기공장에 대규모의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 그 공장에서 일을 하던 여자 근로자들의 산지사방 흩어진 사지를 수습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 해 8월 그는 일선에서 오스트리아 군이 발사한 포탄으로 인해 다리에 파편이 박히는 상처를 입어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두 번이나 은성(銀星) 무공훈장을 받았고 중위로 승진했다.
밀라노로 후송되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는 미국 출신 간호사에게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이것은 헤밍웨이가 그녀에게 지녔던 짝사랑이나 거의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그가 자기에 비해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퇴원하고 그녀가 귀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말았다.
이 비극적인 사랑을 소설화한 것이 1929년에 발표한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다.
전쟁이 끝나고 시카고에서 얼마동안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21년 토론토 스타 지의 특파원으로 파리로 갔다.
그의 주벽은 이미 기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파리에는 영국과 미국에서 이주해 온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소위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를 형성했다.
거트루드 스타인이 붙여준 이름이다.
여기서 그는 스콧 핏제럴드, 거트루드 스타인, 셔우드 앤더슨, 에즈라 파운드 같은 쟁쟁한 문인들과 어울렸다.
당시 그들의 생활은 떼를 지어 파티마다 옮겨다니며 술을 마시고 문학과 인생을 논하는 ‘움직이는 연회’(A Movable Feast)였다.
그는 그 당시 그들과 사귀며 경험한 추억을 되살려 죽기 직전에 정리해 기록했다.
이것이 그가 사망한지 3년 후인 1964년에 ‘움직이는 연회’란 이름으로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