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제10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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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석의 [정신건강에세이]

▶승리의 원동력, 처칠의 우울증

2009.06.08 15:27

정유석 조회 수:4073

처칠은 일생 그를 괴롭힌 우울증을 ‘검은 개’란 별명으로 불렀다. 애완견은 항상 주인을 졸졸 따라다니는 습성 때문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해 동안 수상으로 재임하면서 탁월한 영도력을 발휘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영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 앤토니 스토어(Dr. Anthony Storr)는 이 위업을 역설적으로 그가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은 경험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했다. 1940년 전격적으로 유럽 대륙을 석권한 독일군 앞에 전세는 영국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던커크 철수 후,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지도자라면 누구나 영국의 패전을 예측했을 것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는 평소 심한 좌절을 맛보고 희망을 잃어 본 사람이 아니라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기 어렵다. 극한 상황에 처해 본 사람만이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찾을줄 안다. 이성적 판단으로는 불가능해도 일반인들이 도저히 내기 힘든 만용에 가까운 용기를 부릴 수 있다. 적에게 포위되어 고립 무원의 상태에 놓였던 사람만이, 이것을 헤치고 나가려는 투지가 생긴다. 이들만이 결사 저항의 의미를 알며 또 이것을 남에게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처칠은 바로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 그는 일생 동안 여러 차례 절망과 낙심을 경험했으며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울증과 부단한 싸움을 벌여 왔기 때문에 투철한 의지를 지닌 사람만이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남들에게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전쟁에서 이기자 영국 국민들은 그를 버렸다. 선거에서 노동당을 선택했으며 이에 따라 처칠은 수상에서 사임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51년,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무렵 보수당이 다시 정권을 얻게 되자 처칠은 수상에 복귀했다. 그러나 전시 내각과는 달리 제2차 수상 자리에서 처칠은 탁월한 영도력을 보이지 않았다. 외교에서 그는 아직도 대영제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산적한 국내 안건, 특히 전쟁수행으로 인해 거의 파산 상태에 빠진 경제력을 해결하는 데에는 거의 무능력했다.

그의 특기라고 말할 수 있는 외교에서조차도 수완을 발휘하지 못했다. 2차 세계 대전 후 형성된 동서 열강의 첨예한 대결을 개선할 목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최고 지도자들을 대서양 상의 영국 영토 버뮤다에 초청해 회담을 열었지만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2차 대전을 통해 그는 명연설로 영국인과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었다. “나는 피와 노력과 눈물, 그리고 땀밖에 바칠 것이 없습니다.”“우리는 땅에서 바다에서 그리고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능력과 또 하나님이 주신 모든 힘을 다해서.”“우리는 낙오하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싸울 것입니다. 무슨 대가를 바쳐서라도. 우리는 해안에서 싸우고 상륙지점에서 싸우며 들판에서 싸우고 길거리에서 싸우며 산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명 연설은 더 이상 없었다.

오히려 수상으로 두번째 재임하면서 80세 생일을 일주일 전 남긴 연설에서 정확한 판단력을 구사하던 보통 때와는 달리 숨겨야 할 외교적 일급 비밀을 만천하에 들어내는 우를 범했다. 그는 1945년 5월, 영국군 총사령관에게 당시 영국군에 투항한 독일군 무기를 모두 비축해 두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다가 만일 소련군이 진격해 오면 독일 영토로 들어오면 이것을 가지고 독일군을 재무장시켜 소련군의 진격을 막으라고 명령했던 사실을 발설한 것이다. 그 결과 동서진영의 화해를 꾀하던 자신의 구상에 스스로 찬 물을 끼어 얹은 격이 되었다.

1951년에서 1955년까지 계속된 제2차 내각에서 처칠 수상은 고령으로 인한 노쇠 현상이 나타났으며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고혈압과 동맥 경화증이 악화되어 여러 차례 뇌졸중(腦卒中, Stroke)으로 인한 치매까지 발생했다. 이러한 사실을 후에 주치의 모런 경이 자서전에서 밝혔다. 이렇게 악화된 상태로 처칠은 수상으로서의 격무를 담당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