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작가의 창작마비(Writer's Block)’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시기는 제이차 세계대전 직후였다. 당시 미국 문화계에는 두 가지 중요한 현상이 발생했다. 첫째, 정신분석학이 각광을 받은 것이다. 20세기 초 주로 유태계 정신과 의사들에 의해 유럽에서 정신분석학이 태동했는데 나치스가 등장해 유태인들을 박해하자 수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새로운 이론을 흥미 있게 받아들이는 미국이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정신분석학을 만개 시켰다. 둘째로 59년대에 유난히 기라성같이 유명한 작가들이 미국 문단에 등장한 것이다. 노먼 메일러, 솔 벨로우, 랠프 엘리슨, 트루먼 커포티, 유진 오닐, 테네시 윌리엄스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이 등단했다.
한동안 유명인이나 부자들은 정신분석을 받는 게 유행이었다. 마치 오늘날 개인 트레이너나 자가용 비행기를 갖는 것 같은 신분상승을 과시하는 수단도 되었다. 많은 작가들도 정신분석을 받았으며 예술 작품이란 노이로제의 결과라고 이들을 연관시키는 이론이 번번하게 대두되었다.
일찍이 1941년 저명한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은 ‘상처와 화살(The Wound and the Bow)’이란 책에서 천재는 미쳤다는 그리스 신화를 다시 불러 일으켰다. 찰스 디킨슨이나 키플링 같은 작가들이 어린 시절 입은 심리적 상처를 예로 들어 “천재와 질병은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 1945년에는 친구였던 스캇 핏제럴드의 말년 작품들을 모은 ‘파멸(The Crack-Up)’을 예로 들었다. 23세에 혜성 같은 명성을 얻고 40세에 모든 것을 잃었으며 44세 나이에 요절한 작가 스캇 핏제럴드. 죽은 후에 출간된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아무런 선택도, 길도, 희망도 없다”고 적었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은연중에 작가란 젊은 나이에 퇴장하는 것이 정상적인 패턴이란 인상을 심어주었다. “미국 생활에서 제2막은 없다”라는 표현도 했다.
1947년 평론가 윌리엄 베럿(William Barrett)은 ‘작가와 정신병’이란 에세이에서 천재 작가들이란 ‘소외된 노이로제 환자들’이라고 정의했다. 거짓과 위선으로 뒤덮인 현대 사회에서 진실의 근거를 추구하다보면 점점 더 깊게 무의식을 탐구하게 되며 결국 자신을 정신 이상의 경지로 몰고 간다고 했다. “작가의 게임이란 일정한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일인데 불행하게도 많은 작가들은 그 선을 넘고 만다”고 주장했다.
모든 작가가 정신병 환자라는 의견에 많은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정신분석가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은 에드먼드 버글러(Edmund Bergler)박사였다. 그는 비엔나에서 개업을 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1940년대와 50년대에 ‘작가의 창작마비’에 대해 아주 확신에 찬 이론을 전개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작가의 창작마비(Writer's Block)’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그 원인이 출생 직후인 구순기에 원할 때마다 모유를 주지 않은 어머니에게 앙심이 생겨 발생한 ‘구순기 피학대증(Oral Masochism)’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구순기에 경험한 기근이 뇌리에 박혀 나중에 글이 막히면 재생되는데 그것이 바로 창작마비라는 이론이다.
버글러 박사는 40명 이상의 작가를 치료했으며 자신의 분석에 따라 1백%가 완치되었다고 주장했다. 작가들은 숨은 열등감을 창작 때 느끼는 과대 망상적인 쾌감으로 보상받으려고 한다. 그것은 일반인들이 경험하는 즐거움에 비할 수 없는 쾌감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에도 이런 구닥다리 같은 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가물에 콩 나기만큼 아주 드물다.
참 무서운 병이로군요.
젖먹이 때의 경험이 장성한 어른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니.....
한 참 글을 쓰던 작가가 글이 막히었을 때
얼마나 낭패와 절망을 느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