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제10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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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석의 [정신건강에세이]
 
 

 

 

병적 도박이란 만성 질환으로 간주되는데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에 의하면 그 과정은 4개의 단계에 걸쳐 진행하면서 악화 된다. 일반적으로 용납된 사회도박이 병적 도박으로 바뀌려면 우선 ‘돈을 따는 단계’로부터 시작한다. 도박자는 흔히 운이 좋아 일년 동안 죽도록 벌어봤자 손아귀에 만져보기 힘든 많은 양의 돈을 도박으로 얻는다. 이 시기에는 매사가 수월하게 잘 풀려서 돈을 잃기보다는 딸 때가 더 많다. 돈이 무척 잘 굴러 들어온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도박자’에서도 주인공 알렉세이나 폴리나의 할머니가 처음 도박에 돈을 걸었을 때 연속 횡재한다. 도박자는 시간과 정력을 쏟아 기술을 개발하면서 자신감이 점차 높아진다. 돈을 연속 따면 자신이 마치 특별한 사람인 양 느껴지고 무한한 힘을 가졌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래도 도박인데 잃는 경우가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딴 것에 대해서만 기억하고 잃은 경험은 무시하거나 부정한다. 그는 운이 계속되어 도박판을 휩쓸고 일확천금으로 부자가 될 꿈에 사로잡힌다.

이 단계에서 도박자는 자신이 지닌 열등감, 심리적 불안 등을 모두 도박을 통해 해결하려 하며 가족이나 친지들과 유지해오던 유대감마저 차차 잃게 된다. 이 돈을 따는 첫 단계는 도박에서 주로 흥분을 추구하는 사람들, 특히 젊은 남자에서 자주 나타난다.

다음 단계는 ‘돈을 잃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모두 다 잡았다가 놓치는” 아슬아슬한 경험, 지려 해도 질 수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 뜻하지 않은 불운, 예를 들어 돈을 건 경마가 선두에서 달려오다가 결승점을 눈에 두고 다리가 부러져 승부를 놓치는 경우 같은 불운을 경험한다. 이런 식으로 돈을 잃으면 손해본 것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심혈을 기울이게 되고 따라서 무리를 반복하다가 계속 돈을 잃게 된다. 어떤 도박자들은 돈을 따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 바로 잃는 단계부터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은 주로 여자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은 긴장이나 흥분을 추구하기보다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거나 고독감을 모면하려고 도박을 시작하는 경향 때문이다.

통계를 보면 여성 도박자들은 이혼녀나 독신녀가 많고 남성에 비해 도박을 늦게 시작하는 편이다. 도박의 동기도 경제적인 소득보다는 남들과 어울리려는 목적이 더 크다. 그러나 남성보다 훨씬 빨리 빠져 들어가는 경향이 있으며 더 빨리 빈털터리가 된다. 이 단계에서 흔히 돈을 잃은 사실을 가족에게 숨기려 하고 가재도구들을 내다 팔거나 남으로부터 돈을 꾸어 도박 자금을 마련한다. 돈을 따는 경우라 하더라도 거의 틀림없이 더 큰 판에 걸었다가 종내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십상이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마지막 승리를 위해 치를 대가라고 자기 행동을 합리화한다.

돈을 계속 잃다 보면 결국 ‘필사적인 단계’에 이른다. 도박을 계속하기 위해 사기나 횡령을 일삼는다. 잠을 못 자고 식욕을 잃으며 신경이 날카로워 지며 우울증에 빠진다. 또 새 이름을 갖고 새 사람으로 변신하는 환상에 젖는다. 이 단계에서 도박의 70%는 자살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으며 16%는 실제로 자살을 기도한다. 이 무렵에 구속되어 감옥 생활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마지막인 ‘포기 단계’에 이르면 환자는 도박을 통해 돈을 따서 경제적으로 회복해 보겠다는 희망은 아예 접어버리고 만다. 이미 이길 생각을 포기했기 때문에 마구 조심 없이 도박을 해서 설사 좋은 패를 쥐고 있어도 모두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설 ‘도박자’ 마지막 부분에서의 주인공 같이 폐인이 되어 비참한 생활의 영위하다가 돈 한 푼만이라도 생기면 짜릿한 흥분을 맛보기 위해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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