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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양반/오응택 글

2018.09.04 23:11

원방현 조회 수:59

 

양반 (兩班)

고려~조선시대 지배신분층

                                        글/오응택 

 

내용

 

양반은 처음에는 관제상의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조선 초기부터는 관제상의 문·무반 뿐 아니라 점차 신분층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국왕이 조회(朝會)를 받을 때, 남향한 국왕에 대하여 동쪽에 서는 반열(班列)을 동반(東班, 文班), 서쪽에 서는 반열을 서반(西班, 武班)이라 하고, 이 두 반열을 통칭하여 양반이라 하였다. 이러한 관제상의 문·무반이라는 의미의 양반 개념은 이미 양반관료체제가 처음으로 실시된 고려 초기부터 사용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동반과 서반 이외에 남반(南班)이라는 반열이 있었다. 동반과 서반이 북좌남향(北坐南向)한 국왕에 대하여 동쪽과 서쪽에 서는 반열인 데 비하여, 남반은 남쪽에 서는 반열이었다.

 

남반직은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적어도 1033(덕종 2) 이전부터 있어온 듯하다. 남반직은 액정국(掖庭局), 통례문(通禮門) 등에 두어졌던 내료직(內僚職)으로서, 왕명출납, 국왕호위, 궁중당직 및 조회·의식의 의장(儀仗)을 담당하였다. 남반직이 이와 같이 국왕 측근의 내료직 이었기 때문에 국왕의 입장에서 중요시하여 남반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반열을 둔 것이었다.

 

그러나 양반관료체제가 정비되면서 남반은 동·서반 양반에 눌려 점차 7품 이하의 천직(賤職)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따라서 남반직은 잡류(雜類), 환관이나 승려의 자손, 혈통에 흠이 있는 양민(良民) 등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맡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 조선시대의 지배층은 동·서·남 3반이 아닌 동·서 양반으로 정립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양반이라 하면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양반관료체제가 점차 정비되면서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뿐 아니라 그 가족, 가문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다. 가부장적(家父長的)인 가족 구성과 공동체적인 친족 관계 때문에 문·무반직을 가진 사람의 가족과 친족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음직(蔭職)과 과거를 통한 관직의 세전(世傳)과 그들 간의 폐쇄적 혼인 관계로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관제상의 문·무반을 뜻하는 본래의 양반 개념은 고려, 조선시대의 지배 신분층을 뜻하는 양반 개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 고려시대의 양반이라 하면 대체로 관제상의 문·무반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고려 말 조선 초기부터는 양반이라 하면 관제상의 문·무반 뿐 아니라, 점차 그들의 가족이나 친족까지 포함되는 지배 신분층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다.) 

                                  

양반은 사대부(士大夫), 사족(士族), 사류(士類), 사림(士林)이라고 불려졌다. 사대부란 본래 문반 4품 이상을 대부(大夫), 문관 5품 이하를 사()·낭관(郎官)이라고 한 데서 나온 명칭이었다. 그러나 사대부는 문관 관료만이 아니라 무반까지를 포괄하는 관제상의 문·무반 양반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사대부는 양반 관료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문관 관료만을 지칭하는 사대부가 문·무 양반 관료의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은 조선이 문관 관료에 의하여 주도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사대부는 특히 주자학을 신봉하는 고려 말의 문관 관료, 나아가서는 독서인층(讀書人層)을 의미한다. 사대부라는 용어가 고려말 이후에만 나타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대부 중에 사()는 다시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로 구분되고, 대부(大夫)는 다시 공()과 경()으로 구분되기도 하였다.       

 

사대부가 될 수 있는 족속을 사족(士族)이라고도 하였다. 사족은 ‘사대부지족(士大夫之族)’의 준말이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이라는 용어 못지않게 사족이라는 용어가 많이 쓰였다. 양반이라는 용어는 문·무반으로서 양반·지배 신분층으로서의 양반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어서 혼동되기 쉬웠다. 반면, 사족은 양반 신분층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족과 비슷한 용어로 사류(士類)와 사림(士林)이 있었다. 사류는 사족과 마찬가지 뜻으로 쓰였다. 사림은 ‘사대부지림(士大夫之林)’의 준말로서 사대부군(士大夫群)을 뜻하였다. 따라서 사대부보다 사림이, 사림보다 사류가, 사류보다 사족이 더 넓은 범위의 양반층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사림은 뒤에 유림(儒林)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관료가 되는 것이 양반이 되는 기본 조건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부터 양반층이 확대되어 모든 양반이 4() 내에 관료인 조상을 가질 수 없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양반이 되는 덕목이 유교 교양, 관직 이외에 도덕이 포함되었다.   

 

박지원(朴趾源) [양반전]에 “글을 읽는 사람을 사()라 하고, 벼슬하는 사람을 대부(大夫)라 하며, 덕이 있는 사람을 군자(君子)라 한다.” 라고 한 내용이 그것이다. 조광조(趙光祖) (유교에 입각한)도덕 정치도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조선 후기에 유림이라는 말이 쓰인 것도 이에서 연유한다.    

 

유림은 실제 정무에는 관계하지 않지만 강력한 여론을 형성하여 정치에 막중한 영향을 미쳤다. 재야에 있는 산림(山林)이 여론을 움직이는 핵심이 되었다. 산림은 고려의 국사(國師)와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유림의 여론 정치가 실시된 셈이다. 이들은 대외 정치나 이데올로기 확립, 권력의 추이에 따라 집단으로 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등이 그 예이다.   

 

양반 개념은 한말, 일제시대에 이르러 크게 변화하였다. 조선 후기의 양반의 수는 공명첩(空名帖), 관직매매, 족보위조 등을 통하여 극도로 늘어나게 된다.

 

양반 중에는 문벌가문이 있는가 하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양반임을 사칭(詐稱)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리하여 같은 양반 중에는 문묘에 종사된 대현(大賢)이나 종묘 배향공신(配享功臣)을 배출한 국반(國班) 및 대가(大家), 세가(世家) 이외에 도반(道伴), 향반(鄕班), 토반(土班), 잔반(殘班) 등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벌열(閥閱)이 아닌 미천한 양반은 양반으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말에 이르러 전통적인 신분 체제가 붕괴되면서 더욱 심해져서, 양반이라는 호칭마저 ‘이양반’, ‘저양반’ 하는 대인칭(對人稱)으로 격하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