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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문 사화와 당쟁/오응택 글

2018.09.04 23:12

원방현 조회 수:60

 

사화(士禍)

                          글/오응택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 말 주자학자(유학자 또는 성리학자)는 둘로 나누어졌다. 소수의 유학자들은 조선 건국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은 조선의 중요관직을 차지하여 중앙집권적인 유교국가를 완성하는데 공헌하였다. 국가 공신으로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부유한 생활을 했다. 이들을 훈구파라 한다.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다수의 유학자들은 신하가 임금을 죽이고 세운 나라로 유교윤리에 맞지 않아 곧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주자학(유학)을 연구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었다. 조선은 멸망하지 않고 성종 때 유교국가를 완성하고 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들은 높은 학식과 높은 도덕성을 갖고 성종 때부터 과거시험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성종은 훈구파를 견제하고 국가의 참신함을 기하기 위하여 새로운 신진세력(사림파)을 국가 요직에 등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조선은 기성 정치세력인 훈구파와 참신성을 가진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와 정치충돌이 있었다.

이런 신구세력의 대립으로 일어난 사화가 네 번 있었다.

첫 번째 사화가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 4, 1948)

사림파의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제자 김일손이 성종실록에 실리기 위한 사초(史草)문제가 있었다. 훈구파 유자광, 이극돈이 중심이 되어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난하는 글이란 모함으로 사림파의 김일손 등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 사화(士禍, 史禍).

두 번째 사화는 갑자사화(甲子士禍) (연산군 10, 1504)

연산군 생모 윤비를 내쫓고 죽인 사건이 있었다.(윤비 폐비 축출 사사 사건) 윤비 폐비 사건에 찬성한 이극균, 윤필상, 김굉필 등 10여명을 사형에 처하고 죽은 한명회, 정창손등 7명은 죽은 시체를 꺼내어 목을 베는 부관참시를 하고 그 가족까지 처벌한 사화다.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계기로 반대파 세력을 제거한 후 거침없는 독재정치와 향락

생활로 백성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성희안, 박원종이 중심이 된 귀족세력은 연산군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이것이 중종반정이다. (연산군 12, 1506) 중종은 어진 임금으로 사림파 조광조를 등용하여 나라 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조광조는 현량과를 설치하여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는 등 유교의 이상정치(도학정치)를 시도하였다. 현량과를 통해 사림파인 조광조 일파가 관직에 많이 진출하게 되자 신구정치 세력이 충돌하게 되었다.

세 번째 사화가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 14, 1519)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가 위훈삭제사건 (중종반정 공로자중 76명의 공훈을 삭제하는 사건)을 계기로 사림파 일파인 조광조 등을 죽이고 귀양 보낸 사건이다.

네 번째 사화가 을사사화(乙巳士禍) (명종 즉위원년, 1545)

중종의 배다른 두 형제인 인종과 명종간의 왕위 다툼이 있었다.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과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의 대립이 심각하였다. 사림파와 가깝고 그들의 지원을 받은 윤임을 대윤(大尹)이라 하고 훈구 세력인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했다. 윤임 일파는 자기네는 정의로운 대윤이라 하고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부르면서 무시해왔다. 인종이 1년 만에 돌아가고 이어 명종이 즉위하면서 윤원형 일파가 윤임 일파를 제거한 사건이 을사사화다.

다수인들이 파당을 가지고 논쟁에 따른 대립과 투쟁과정에서 패자(敗者)는 반역자로 몰려 지위를 빼앗기거나 목숨까지 잃었다. 한 파가 승리하면 이에 대해서 새로운 반대파가 생겨 그것이 사화를 만들어내곤 하였다. 사화에 싫증을 느낀 선비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서원을 세워 자녀와 뜻이 같은 사람을 모아 교육을 실시하여 이를 통해 동족적인 성격을 가진 당파의 결합을 굳건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사화에 의해 육성된 정치 비판과 반대파에 대한 복수관념은 파당의 소굴이 된 서원의 발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당쟁을 격화시키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당쟁(黨爭)

당쟁은 조선의 숭유정치와 정치제도의 모순으로 일어났다.

조선의 유교양반 국가 체제가 정비되면서 유학의 정치화 현상을 빚어냈다. 특히 조선의 유학은 본래의 영역을 벗어나 배타적이요 현실 보다 이론에 치우친 유학이었다. 이러한 추세로 당시 양반 지배계층은 유학공부를 통해 중앙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최고 목표였다. 당시 양반 계급인 지배층은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고 관직을 차지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제도상의 모순점을 갖고 있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양반의 수는 크게 늘어나는데 조선의 시작에서 말기까지 양반관직의 수는 400여개 밖에 안되었다. 생업에 종사 할 수 없는 양반은 관직을 갖기 위해 분열하고 대립할 수밖에 없어서 일어난 사건이 당쟁이다.

당쟁의 시초는 선조7(1574)에 양반관리의 추천 임용권을 쥐고 있는 이조전랑의 임용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퇴계 이황의 젊은 문인인 김효원이란 선비가 이조전랑에 추천되자 심의겸이 반대하고 나섰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한 때 유형원의 식객으로 있었다는 이유로 관리인사에 공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반대했다. 김효원은 심의겸에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조전랑에 임명되었다. 그 이유는 윤원형의 세도정치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선비들의 지지를 김효원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선비는 둘로 나누어졌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젊은 선비와 심의겸을 지지하는 나이 많은 선비들이었다.

선조 8(1575)에 김효원과 가까운 사간원의 허엽이 우의정 박순을 부패혐의로 공격하자 박순이 사직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선비들이 둘로 나누어졌다. 김효원을 비롯한 젊은 선비들은 허엽의 행동이 옳다고 했고 심의겸을 비롯한 나이 많은 선비들은 그것을 지나치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김효원의 동인과 심의겸의 서인의 당이 생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당쟁이다. 동인과 서인으로 부르게 된 이유는 동인인 김효원의 집이 왕궁의 동쪽에 있는 건천동(을지로4)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은 왕궁의 서쪽인 정릉방(정동)에 있어서 서인이라 불렀다.

동인과 서인의 당쟁은 사소한 관직 임용으로 시작되었다. 당쟁은 선비들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여 국왕의 현명한 판단을 도모하는 좋은 점도 있었다.

당쟁은 날이 갈수록 무모한 비판도 있고 국가를 위기에 처하게 하였고 나중에는 살육행위로까지 발전하여 국가 사회발전에 암적인 존재가 되고 양반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격화시키었다.

동인은 고급관직을 가진 서인을 공격하였다. 동인은 물증도 없이 사간원, 대사헌을 지낸 서인 윤두수를 부패혐의로 공격하여 탄핵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 일본의 조선침략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서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정사(대표) 황윤길은 서인으로서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한 반면에 부사(부대표) 동인인 김성일은 전쟁의 기미가 전혀 없다고 보고했다. 당파적 입장에서 서로 상반된 견해를 보고했다. 이런 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고 전국을 일본군에 유린당하는 국가위기를 만들었다.

임진왜란 전에 세자 책봉문제로 동인은 서인을 몰아내고 동인정권을 세웠다. 동인들은 서인 처벌 문제로 둘로 나누어졌다. 영의정 이산해를 중심으로 서인을 강경하게 처벌하자는 동인을 북인이라 하고 임진왜란에 공이 많은 유성룡을 중심으로 서인을 관대하게 처벌하자는 동인을 남인이라고 하였다. 전쟁 중에 세력을 확대한 북인들은 남인 유성룡을 나라를 잘못 이끈 소인으로 몰아 탄핵하고 광해군(1575-1641)을 옹립하여 북인정권을 수립하였다. 광해군은 북인정권을 반대한 사람들을 모두 몰아내고 북인의 단독정권을 수립하였다. 광해군은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선조의 왕후 인목대비를 왕궁에 유폐시킨 것이 빌미가 되어 반대파 서인들이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선조의 서자 능양군을 세운 인조반정(1595-1649)이 일어났다. 1623년 서인이 중심이 되고 남인이 동조하는 형식으로 인조가 임금이 되었다.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이 되었지만 서인은 병조(국방), 이조(관리관찰), 호조(재무)판서의 정부요직을 독점하여 사실상 서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서인 정권은 국제 정세에 어두워 청의 침략을 받아 삼전도(서울 송파)에서 인조임금이 청태종에게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하고 청의 신하국가가 되었다.

현종(1614-1720)이 즉위한 후 당쟁은 예송논쟁의 성격을 띠고 진행되었다.

예송논쟁(유교 예법에 대한 논쟁) 2차에 걸쳐 서인과 남인간의 당쟁으로 일어났다. 1차 예송논쟁은(1659) 효종이 서거하자 계모인 자비대비가 몇 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의 논쟁이 일어났다. 서인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인 윤선도 등은 장남이기 때문에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현종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의 주장을 채택하여 남인 윤선도를 귀양을 보냄으로 해결했다. 2차 예송전쟁(현종15, 1674)은 현종의 어머니 인성왕후가 사망하자 서인은 대공설(9개월간 상복 입음) 남인은 기년설(1년간 상복 입음)을 주장하였다. 남인의 주장이 선택되어 허적이 영의정에 임명되어 남인 정권이 들어섰다.

숙종 때 이르러 남인과 서인의 당쟁은 살육으로 진전되었다. 숙종6(1680)에 남인정권이 서인정권으로 바뀌자 남인 지도자인 허적, 윤후 등이 죽임을 당했다. 숙종15(1689)에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태어난 왕자 균(후일 경종)을 왕세자로 삼자는 주장에 서인정권이 남인정권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서인의 송시열, 김수항 등이 죽임을 당했다. 숙종20(1694)에는 다시 서인 정권이 들어서자 남인의 민암 등이 죽임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서인은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경종(1688-1724)초에 세제(世弟) 영잉군(후일 영조)의 책봉문제로 신임사화(辛任士禍)가 일어나 소론정권이 수립되었다. 노론은 왕세제에게 정권을 넘기라는 대리청정을 요구하다가 소론의 공격을 받아 이이명, 김창집 등 노론들이 죽임을 당했다.

1725년에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를 직접 목격하였다. 당쟁의 피해를 몸소 경험한 영조는 노론과 소론 양파의 조정에 힘을 기울이고 당파 싸움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였다. 다음 왕인 정조도 역시 탕평책을 계승함으로써 당쟁은 많이 완화 되었다.

그 후 순조, 헌종, 철종 3대는 외척이 권세를 잡았으나 이 전에 본 바와 같은 참변은 없었다. 다음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대원군이 집권하여 당파 타파와 문호개방, 인재등용 정책으로 당파 싸움은 점차 쇠퇴하여 갔다.

당쟁은 초기에는 정책대결로 출발하였다. 후에는 범법(犯法)을 증거에 의거하지 않고 인신공격을 통하여 여론재판으로 유도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훌륭한 인재등용의 길을 막고 국가 재정의 파탄과 백성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리고 관리의 부패를 조장하고 사회적으로 서로 협력하는 기회를 말살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와 조선의 당쟁을 비교하면 생각할 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