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제10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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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이스라엘 성지순례 /김영덕

ydkim 2018.08.01 21:14 조회 수 : 127

 

수필 

                     이스라엘 성지순례

 

                                                                              김 영 덕

 

 

 

성경에 펼쳐진 역사 현장을 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이해하고 싶은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원일 것이다.

 

넓은 의미의 성지순례는 이스라엘 성지 뿐만 아니라 이집트, 터키, 그리스, 키프로스, 바티칸, 로마 그리고 요르단의 성지까지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좁은 의미의 성지순례는 이스라엘이라 한다.

 

나는 이스라엘 및 요르단을 제외하고 지난 두 차례의 여행으로 상기 각 나라 성지순례를 마쳤다. 이어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되어 마침내 작년 봄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남가주에 사는 여행 친구, 고등학교 동기 다섯 부부, 서울에서 합류한 동기 두 부부가 버지니아의 한 관광회사를 통한 동부의 교포 여덟 부부와 함께 일주일여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떠났다. 여행의 인솔자인 조앤 한과 일행 29(아내는 건강상의 문제로 여행을 취소)까지 모두 30명으로 구성된 팀이다.

 

 

 

<<1~2>>

 

첫날 오전, LAX 공항에서 남가주의 9명이 뉴욕 경유 이스라엘의 텔아비브(Tel Aviv)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뉴욕에 도착하니 그곳에서 인솔자와 16명의 순례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콘티넨털 비행기에 탑승해 텔아비브로 출발하였다.

 

322일 오후, 우리 일행 26명은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하였고 호텔에 들어와 저녁식사를 마쳤다. 가이드의 안내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편안히 휴식하였다. 서울에서 온 네  명이 저녁에 우리와 합류하였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안내할 가이드는 중동학 전공의 유학생으로 왔다가 여기서 10여년째 거주하고 있는 한국 교포로 이스라엘 역사와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3>>

 

삼일째인 3 23일 아침식사 후, 대기 중인 버스에 승차하여 간단한 텔아비브 시내관광을 하고 일행은 한 시간 후 예루살렘(Jerusalem)에 도착하였다. 시내 중심가의 한식당에서 점심을 한 다음 이번 성지순례의 첫 여정을 시작하였다.

 

위대한 성읍 예루살렘은 삼천 년의 긴 역사를 누리며 오늘날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슬람 교인들의 최고 신성한 도시가 되었다. 해발 760m의 고원지대인 예루살렘은 남쪽으로는 힌놈 골짜기(Hinnom Valley), 동쪽으로 기드론 골짜기(Kidron Valley)에 둘러쌓여 있다. 

 

이스라엘은 1948 5 14일에 독립되어 약 이천 년만에 국가를 건설하였으나 예루살렘은 구도시와 신도시의 동, , 북쪽은 요르단의 영토로 남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67 6월의 6일 전쟁으로 구도시 안에 있는 성전산(Mt. Temple)을 제외하고는 모두 점령하였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와의 두 차례(1993, 1995)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아직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의 소요와 폭동은 계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가자’(Gaza)와 ‘여리고’(Jerico) 대부분 지역이 P. L. O.의 자치행정 구역이 되었다. 우리의 순례 기간 중 두 민족 간 사소한 분쟁이 거리에서 벌어졌는데,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미국에 남은 가족들한테서 걱정스러운 안부전화가 걸려왔다. 외국에서 더 염려하는 듯한 인상이 들었다.

 

이스라엘은 위 북쪽으로 레바논과 시리아, 옆 동으로는 요르단, 밑의 남쪽으로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서쪽으로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중동에 위치하며 세계의 분쟁 다발지역 중 하나로 수도는 예루살렘이다.

 

총면적은 22072km2, 남한의1/5정도 되는 조그만 나라다. 인구는 790만 명으로 유대인 75.3%, 아랍인 20.5%, 기타 4.2%이며, 이중 약 350만 명이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산다. 유대인 중 구교(Catholic) 신자가 40%, 무신론자 30%, 기독교인 3%, 예수 탄생 국가의 체면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소수민족으로서 이슬람 교도는 아랍인의 2/3 정도를 차지한다. 지중해성 기후로 온도는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겨울 기온(11~3, 우기)은 섭씨 8도에서 21도를 오르내리며, 여름 기온(4~10, 건기)은 지역에 따라 섭씨 23도에서 39도를 기록한다.

 

우리는 먼저 베드로 통곡 교회(Church of the Cockcrow, 닭이 운다)로 향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가롯 유다에게 배신당한 예수님은 체포되어 첫 번째 심문을 받았다( 26:57-68). 예수님의 뒤를 일정한 거리로 따라왔던 베드로는 이곳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다. 그때 닭의 울음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대로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통곡을 한다. 이 교회는 1931년 가톨릭에 의해 세워졌으며 교회 지하층에는 예수님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감옥과 바위가 발굴 보존되어 있다.

 

시온산 다윗왕의 무덤은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 다음으로 신성시하는 곳이다. 이스라엘 어린이들은 무덤 앞에서 다윗의 용맹과 구국 정신의 근본이 ‘여호와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데 있다’는 신앙의 교육을 받는다. 다윗의 석관 위 천에는 이스라엘의 상징인 ‘다윗의 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다윗왕의 무덤은 12세기 십자군 시대에 ‘마가의 다락방 교회’ 위치에 세운 기념 묘일 뿐 실제 무덤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날, 저녁에 마가의 다락방(Last Supper Room)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으며, 함께 유월절 만찬을 드셨다. 또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오순절, 120명이 모여 기도하던 중 각자 머리에 불꽃이 이는 성령 강림의 기적을 체험한 장소이다.

 

점심 후 9km 떨어진, 감람나무가 무성한 해발 770m의 베들레헴(Bethlehem)을 향하여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 도시는 다윗의 고향이기도 하며 사무엘이 다윗에게 성령 충만의 표시로 위에서 아래로 올리브기름을 부은 곳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탄생이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다 하여 예수탄생교회(Church of the Nativity)가 건축되었다. 예수 탄생의 베들레헴 동굴 위에 세워진 본 교회 왼쪽에 있는 큰 교회(1981년 프란시스코 수도회 건축)에서 성탄절 자정 미사를 매년, 전 세계에 실황 중계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 보니 텔레비전으로 본 기억이 난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의 역사를 주전(B. C: Before Christ)과 주후(A. D: Anno Domini)로 나누는 대사건이 되었다.

 

예수탄생교회 내부에 있는 지하로 내려가면 폭 3.5m, 길이 13m 정도의 예수 탄생 동굴이 나온다. 예수께서 탄생하신 장소는 은으로 만든 별(Star of Bethlehem)을 새겨 정확한 위치를 표시해두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별을 만지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린다. 마치 예수님 탄생과 인류 구원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 같았다.

 

저녁에 고급 관광호텔에 들어갔는데 바로 옆 블럭이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이니, 야간에는 외출을 삼가라는 인솔자의 주의로 도보 시내 구경의 계획은 접어야 했다. 내일의 본격적인 성지순례에 대한 기대와 긴 시간 비행기 여행으로 인한 피곤함이 겹쳐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4>>

 

이스라엘 여행이 나흘째에 접어든 324, 사해(Dead Sea)와 마사다(Masada) 방문 일정으로 길을 나섰다. 하행하는 중간 경유지인 여리고(Jerico)에 잠시 머물렀다. 예루살렘의 동쪽 약 35km 지점, 유다 광야에 아름다운 ‘오아시스의 여리고’ 도시가 있다.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258m가 낮은 요르단 골짜기에 있어 겨울에도 기후가 따뜻하다. 여기서 헤롯왕이 만든 수로를 따라 올라가면, 분당 약 4L 이상의 물이 솟는 선지자 엘리야의 샘이 있다. 이 샘물은 유다 광야의 젖줄이 되어 직경 5km 정도의 푸른 초원을 이루고 있다.

 

오늘의 여리고는 1967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 후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소를 설립했다. 아름다운 종려의 도시라 불리는 이곳은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요르단 국경과 대치하고 있는 여리고는 P. L. O.의 자치행정수도로 인정(9/10/1995)되어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삭개오가 예수를 보기 위해 올라갔다는 거대한 뽕나무가 여리고의 3시 방향으로 가는 도로 옆 철망 안에 우뚝 서 있다.

 

이어 여리고 남쪽 20km 지점, 사해(Dead Sea) 변에 위치한 쿰란(Qumran)을 방문하였다.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이 1947년 발견되면서 그리스도인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곳이다. 쿰란의 공동체는 주전 140년경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인솔자의 설명이다. 파벌 간 권력투쟁 과정에서 에센파는 헤롯왕의 큰 힘이 되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에센파 공동체의 기초가 되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3:1-2)고 임박한 종말을 외치며 주의 길을 말하던 세례(침례) 요한도 에센파의 일원이다. 그러나 그들은 헤롯왕이 죽은 후, 다시 쿰란으로 돌아가서 생활하였으나 주후 68년 로마에 의해 멸망되었다. 쿰란이 멸망하기 직전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던 문서를 항아리 속에 담아 동굴 여러 곳에 흩어 숨겨 놓고 마시다로 피하여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1947년 베두인 목동에 의해 가장 오래된 성경 사본이 쿰란의 동굴에서 발견되면서 성경 사본 연구에 큰 역할을 하였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성경 사본의 발견 과정은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유대 광야에서 양치기 베두인 소년이 잃어버린 양을 찾다가 큰 동굴(4)을 발견하고 혹시 그 안에 양이 있을까 하여 돌을 던졌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계속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러자 동굴 안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려 그 소년은 아버지를 불러 함께 그 안으로 들어갔고, 동굴 안에서 진흙 항아리 속에 있는 두루마리 문서들을 발견하였다”. 사해사본(Dead sea scrolls)의 발견으로 성경, 고대 히브리어, 유대교 역사 등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쿰란의 폐허로부터 조금 떨어진 언덕에 많은 필사본이 발견되었다는 ‘4번 동굴’이 우리를 비롯한 많은 순례자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

 

사해의 물 색깔은 다른 바다와 같으나 염분 농도가 다른 바닷물보다 5~6배 높다(보통 바닷물의 염분 농도는 4~6%이나 사해의 염분 농도는 약 25%). 사해의 물은 갈릴리(The Sea of Galilee) 호수의 물이 요단강을 거쳐 지구 위에서 가장 낮은 육지(지중해 수면보다 402m 더 낮음)로 흘러 들어와 방출됨 없이 쌓여 생기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염해’(Salt Sea, 창세기 14:3)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생물이 전혀 살 수 없기 때문에 ‘사해’ ‘죽음의 바다’라고도 불린다.

 

사해는 또한 많은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요단강 주변에서 유황과 질산 성분의 물질 등이 함유된 약 700만 톤의 물이 매일 흘러들어오지만 빠져나갈 곳이 없다는 데 있다. 더불어 요르단 계곡의 뜨거운 열기가 수분을 증발시킴으로써 고체 성분만 사해에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사해 주변에 공장들을 세워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는 만큼 ‘죽음의 바다’라기 보다는 ‘보물창고’라 할 수 있겠다.

 

인솔자의 설명과 안내에 따라 우리는 물에 들어가 손발을 가만히 두어도 몸이 둥둥 뜨는 신기한 경험을 하였다. 사해의 물은 피부병에 특수한 치료 효과가 있고, 이곳의 검은 진흙은 피부 미용 및 신경통 등에 특효라고 한다. 사해의 소금과 진흙을 가공하여 만든 화장품이 인기품목이라 하여 선물용으로 구입하기도 했다.

 

오늘의 마지막 여정지인 마사다(Masada)에 도착하였다. 마사다는 사해 서쪽에 위치한 해발 450m의 천연 요새이다. 길이 600m, 200m, 성벽 둘레 1300m의 마름모 꼴은 이스라엘 역사상 주요한 사건의 현장이다. 헤롯왕은 자신의 신변 안보를 위하여 유사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3층으로 된 왕궁과 큰 물탱크, 화려한 목욕탕, 곡식 창고 등을 만들었다.

 

주후 70 8,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은 불 타 버렸다. 당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유대인 열성당원 약 960명이 마사다 요새로 도피하여 로마 제국에 저항하였는데, 로마 군대는 그들을 쉽게 정복할 수 없었다. 3년간의 끈질긴 포위공격으로 마사다의 성벽이 무너지자, 그들은 항복과 죽음의 두 갈래 길 중 죽음을 선택하였다.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본인도 자결하는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마사다는 힘이 약해 죽음으로 항거할 수밖에 없던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다짐한 현장이자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지이다. 이스라엘 군은 훈련 중 제일 마지막 과정에서 마사다 정상에 올라 “마사다의 비극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Masada Never Again)"라고 외친다고 한다. 이와 같은 훈련과 정신 무장이 현재의 강한 이스라엘 군을 만들었구나 생각해 본다. 지금은 마사다 정상을 케이블카로 오르거나, 로마 시대에 만든 약 3km의 뱀길(Snake Path)을 따라 오를 수 있다. 우리는 다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석식 후 호텔에 투숙하였다.

 

 

 

<<5>>

 

325일은 예루살렘의 재순례로 정하고 먼저 감란산(Mt. Olives)으로 갔다. 예루살렘 동편, 기드론 계곡 건너편에 위치한 감란산은 해발 815m, 이 산에 감란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예수님은 이 산을 자주 찾아오셔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셨고,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기도 하셨다. 부활 후 예수님은 이 산에서 5백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다고 한다.

 

 

 

[3-4] 주기도문 교회에서 마주한 한국어로 쓰여진 주기도문.

 

감란산 언덕에 세워진 주기도문 교회(Church of the Pater Noster)는 주기도문이 시작되는 라틴어 ‘Pater Noster ; 우리 아버지’를 따 이름 지어졌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가르치셨고,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 24)을 하신 곳으로 전해오는 이곳에,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614년 페르시아에 의해 파괴되고, 그 후 1106년 십자군에 의해 재건되었으나 이슬람 교도들에 의하여 다시 파괴되었다. 현재의 교회는 1875년 가톨릭의 까르멜파 수녀회에서 건립하였다. 교회 내부에는 1102, 히브리어로 기록된 최초 주기도문 석판과 한국 가톨릭 부산 교구에서 보낸 한글 주기도문 등 80여개 국어로 쓰인 주기도문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어 주의 승천 기념 교회(Church of Ascension)로 이동했다. 이 지점은 예수께서 승천하셨다는 곳으로 감란산 정상에 세워져 있다. 돔 안에 들어서면 중앙에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 밟았다는 승천바위(Rock of Ascension)가 있다. 승천바위를 중심으로 380년경 지붕 없는 팔각형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슬람 교도들에 의해 교회는 파괴되었다. 그 후, 12세기 초 십자군은 다시 교회와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8년 후, 1,187년 십자군의 패배로 이슬람 교도들은 교회와 수도원을 파괴하고, 남은 팔각형의 소형 건물에 둥근 지붕을 씌우고 이슬람 사원으로 변경시켰다. 이 건물을 파괴하지 않고 사원으로 변경한 것은 이슬람 교도들도 예수님의 승천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겟세마네 동산(Garden of Gethsemane)에 갔다. 이곳은 예루살렘의 동쪽 성벽과 마주보는 곳으로 감란산 서쪽 기슭에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으로 들어갈 때에는 팔레스타인 무장 군인들이 버스에 승차하여 인원을 점검하는 광경이 분쟁 지역의 기억을 깨우쳐준다. 이스라엘 군과 대치하고 있으나 거리는 비교적 평온하다. 지역을 돌아보며 양쪽 주민의 빈부 소득격차가 큰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치구역 주민이 훨씬 가난해 보였다.

 

점심식사 후 오후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골고다(Golgotha/Calvary, 헬라어로 해골) 언덕에 가기로 하고 버스로 이동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라틴어로 슬픔/아픔의 길) 길을 걸어야 한다. 비아 돌로로사는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신 뒤 십자가에서 처형되시어 무덤에 묻히시기까지 약 500m의 전체길을 뜻한다.

 

1지점의 예수를 심판하였던 빌라도 법정에서부터 마지막, 14지점의 죽으신지 3일만에 부활하신 빈 무덤까지를 따라 걸으며 각 지점을 지날 때마다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였다. 오늘날 제10지점에서 제14지점까지는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내부에 있다.

 

성묘교회는 옛날에는 성 밖으로 처형 장소 및 무덤 지역였으나 16세기 오스만 터키제국이 황폐된 예루살렘 재건 시 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오늘의 성묘교회는 십자군 시대인 1149년에 재건된 교회로 1291년 다시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다. 현재 성묘교회는 가톨릭교회, 그리스 정교회, 콥틱교회,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안 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등 총 6개 교단이 각각 분할해서 관리하며 이슬람교는 열쇠만 소유하고 있다. 예수님의 무덤(Tomb of Christ)은 예수께서 3일간 머무셨다가 부활하신 빈 무덤으로성묘교회 내부 돔 아래 있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은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 and Western Wall) 방문으로 장식하였다. 60m, 높이 18m의 통곡의 벽은 헤롯왕이 주전 20년부터 46년에 걸쳐 건축한 제2 성전 벽의 서쪽 부분이다. 주후 70, 로마군은 예루살렘 성전을 모두 파괴하고 이 성벽만을 남겨놓았다. 이 벽은 1948~67년까지 요르단 영토에 속하여 유대인의 방문이 금지되었으나 1967 6월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과 6일 전쟁의 승리로 통곡의 벽을 탈환하였다. 통곡의 벽은 지난 2천년 동안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에게 귀향의 꿈을 상징하는 성지가 되어 있다. 이곳은 유대인의 최고의 기도처로서 회당과 마찬가지로 남녀가 각각 나누어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서 기도를 하는데, 우리도 이를 목격하였다. 우리 일행도 서원의 쪽지를 벽 틈에 끼워 넣고 벽에 이마를 대고 정성껏 기도한 뒤 그곳을 떠났다.

 

 

 

<<6>>

 

 

 

[3-5] 가이샤라 항구 유적지에서 고등학교 동기 부부와 함께.

 

 

 

326일 호텔 조식 후, 가이사랴(Caesarea) 항구 유적지로 향하였다. 가이사랴는 지중해안의 항구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저(Augustus Caesar)를 기념하기 위하여 헤롯이 이름 지은 도시이다. 로마 시대 가이사랴에는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었으며 베드로와 바울이 처음 방문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 도시는 아랍과 터키에 의해 두 번 파괴되었다.

 

가이사랴는 20세기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고, 지금도 작업은 계속되고 있음을 보았다. 수로는 갈멜산(Mt. Carmel) 남쪽 샘으로부터 약 20km 떨어진 가이사랴까지 물을 공급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다음 갈멜산으로 향하였는데, 갈멜(하나님의 포도원)산에 엘리야가 단신으로 바알 선지자들과 싸워 승리한 곳에 엘리야 석상이 세워져 있다. 이 석상은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의 목을 밟고 구부러진 칼로 막 내려치려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갈멜산 해안 평야를 따라 나사렛(Nazareth)에 도착하였다. 나사렛은 이스라엘 평원 북쪽, 해발 376m의 언덕 위에 있는 매우 큰 아랍 도시다.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출생 후 잠시 애굽으로 피난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태아에서 유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기까지 생활했던 고향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 나라 사역을 준비하셨고, 도시 중앙에는 수태고지 교회(Church of the Annunciation)와 요셉 기념 교회(Church of St. Joseph)가 있어 모두 방문하였다.

 

수태고지 교회는 예수 탄생 알림교회라고도 하며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해준 장소에, 요셉기념 교회는 요셉과 예수가 목수일을 하였다는 장소에 세워져 있다.

 

갈릴리 지방의 가나(Cana)마을은 나사렛에서 동북으로 7km에 있으며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 초대되었을 때 첫 번째 이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곳이다. 방문 시 한 쌍의 결혼식을 보았고 실제로도 세계 여러 곳에서 가나에 와 결혼식을 올린다고 한다.

 

저녁 무렵, 갈릴리 호숫가의 동북 쪽 한적한 마을, ‘키부츠(Kibutz, 집단)’ 운영의 콘도형태의 호텔에 도착하여 여독을 풀었다. 호텔의 음식과 분위기가 다른 곳과 사뭇 달라 인상적이었다.

 

 

 

<<7>>

 

327일 조식 후 커다란 목선에 승선하여 예수님의 선상 예배지를 향하며 선상 예배를 드렸다. 그날은 마침 이스라엘에서 맞이하는 첫 주일이어서 교회에서 드리는 것과 똑같은 순서로 예배드렸다. 참으로 뜻깊은 찬양과 기도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니 모두 감사와 감격의 희열을 느꼈다. 특히나 예수님께서 호수를 걸었던 모습을 상기시켜 본다.

 

갈릴리 호수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주변이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호수는 남북 길이 21km, 동서폭 14km, 넓이 170km2로 하프 모양이다. 깊은 곳의 수심은 약 50m이고 지중해 수면보다 212m 낮다. 이 호수는 ‘갈릴리 바다’( 6:1) 로도 불리었으나, 염분이 없고 민물고기가 살고 있으므로 호수로 불림이 옳다고 본다.

 

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가버나움(Capernaum), 팔복산(Mount of Beatitudes), 팔복교회(The Church of the Beatitudes), 오병이어 기적교회, 골란 고원, 가이샤라 빌립보(Caesarea Philippi-Banias) 등이 있다. 갈릴리 호수는 이스라엘 생명의 호수로 식수는 물론 농업, 공업용수까지 대부분 충당하며 이곳의 물은 남쪽 360km 떨어진 네겝(Negev) 사막까지 공급된다고 한다.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은 예수님 당시에는 번화하여 세관과 큰 회당이 많았다.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주로 활동하셨으며 이곳에서 가장 많은 이적을 행하셨다. 천장을 뚫고 침대에 뉘인 채 예수님께 인도된 중풍병자를 고쳐주셨고, 또 문둥병자도 고쳐주셨다. 또 소경의 눈을 뜨게하셨고, 혈루증으로 죽은 회당장의 딸을 살려내셨다. 그러나 가버나움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정확히 이루어져, 지금은 모두 파괴되어 종려나무들 속에 폐허로 남아 있다. 주변에는 당시의 맷돌들이 널려져 있다. 가버나움은 1838년 미국인 탐험가에 의하여 발굴이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베드로의 집터에서 5세기경 세웠던 유적들이 발굴되어 그 위에 현대식 가버나움 새 교회를 건축하였다.

 

 

 

 

 

                                                                                          

 

[3-6] 요단강에서의 세례식 모습.

 

 

 

요단강(River Jordan)은 사계절 눈이 녹지 않는 헬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로 흘러 들어오는데 강의 총 길이가 약 450km. 북쪽 발원지는 해발 900m이며 남쪽 사해는 해발 402m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길고 크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40년 만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너간 곳이자, 엘리야가 승천할 때 건넌 곳이 바로 요단강이다. 또한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장소로 새로운 복음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한다. 방문하던 날, 요단강이 시작되는 갈릴리 호수 하구의 침례소에서 여러 명의 순례자가 흰 옷을 입고 침례 받는 것을 목격하니, 그들을 축복해주고 싶었다. 순례 후 어제 묵었던 호텔에서 남은 3일간의 요르단 성지순례를 계획하며 휴식을 취하였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고 보니 성경 말씀이 구체적으로 또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것을 실감했다. 성지순례는 기회가 되면 반드시 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지난 2천년 동안 성지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성지순례는 성지를 연구하고, 그리스도의 교리를 이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생의 발자취가 담긴 이스라엘에서의 성지순례를 통하여 나에게 펼쳐진 광야를 앞으로 나는 어떻게 걸어가며 살아갈 것 인가! 하고 묵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