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제10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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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흰머리 인생 / 김영덕

ydkim 2018.08.01 21:26 조회 수 : 95

수필

 

 

                             흰머리 인생

 

                                                                          김영덕

 

 

 

비행기 타고 미국땅에 발을 디딘지 어언 40여년, 거울에 비친 모습을 내가 보아도 어이쿠! 홍안의 미소년을 자타가 공인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흰머리는 무슨 조화인지!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일진데, 검은머리가 흰머리로 바뀌게 되었으니 이 또한 불효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토록 수많은 머리털이 본의 아니게 어떻게 색깔이 변하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나, 참을 수밖엔 별 도리가 없을 것 같다.

 

40여년 전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와 대학 및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고 북가주 소재 은행원으로 미국 사회 첫 출발을 하였다. 북가주의 미국 직장에서 온종일 오직 미국인들만 상대하다 보니 내 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남가주로부터의 노스탈지아, 손수건의 향수와 동경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가주 쪽으로 이사하기로 하고 대책 없이 사표를 던졌다. 가족을 이끌고 남으로, 남으로 포장마차 아닌 마차를 몰았다.

 

! 아름다운 남가주여!, 이 땅에 내가 왔도다!. 그러나 감상적인 내 마음은 순간적인 흐뭇한 착각에 불과했다. 그 당시 아내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여학교 기숙사 사감 선생과 같은 엄숙한 모습과 입놀림으로 말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요, 배가 불러야 예를 차릴 수 있다는 말을 당신은 아세요? 모르세요?” 포장마차를 타고 왔으면 개척자 정신 흉내라도 낼 수 있는 남편이 되어야지 한없이 감상에 젖어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식이었다. 냉철한 이성으로 돌아온 나는 그때만 해도 흰 머리칼이 아닌 검은머리, 홍안임을 자부하던 터였다.

 

여러 친구로부터 북가주 촌놈이 남가주에 왔으니 식사 또는 술 한잔하자고 전화통에 불이 붙었다. 모두 후일로 미루고 동분서주, 직장을 구하다 보니 드디어 쥐꼬리 월급쟁이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미국인 속에서 살아야만 되는 미국 직장일진데 포장마차 타고 온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두드리면 문이 열린다지만 두드릴 문이 있어야 두드릴 게 아닌가. 한두 번 미국 직장을 옮겨 울며 겨자 먹기 직장생활도 수년이 흐르는 물과 같이 지나가 버렸다.

 

눈을 떠보니 제왕이 된 사람도 있다는데……. 제기랄, 나에게는 무슨 변화가 없을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도다!. 한인사회 유명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 뜻한 바 있어 한미합작으로 은행을 설립하는데 참여할 용의가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미국반 한국반이므로 만족은 아니지만 겉보리 흉년에 꿩 대신 닭이렸다. 쾌히 응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새 직장에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으며 많은 교포를 상대로 헌신적이고 정열적이며 가능한 범위 내에서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교포 고객들이 홍수처럼 밀려왔고, 은행도 2년 만에 자산이 몇 배로 증가하여 나 또한 보람을 느꼈다. 흰머리 보유자가 다 된 나는 최초의 남가주 교포 금융인이라고 자부하여 본다.

 

호사다마, 승승장구만은 없는 법, 한인사회의 의식구조를 나 자신은 이해하나 미국인으로서는 이해 못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 미국인 상사와 의견 충돌이 간간이 발생하였으며 나의 중요했던 검은 머리털 색깔은 점차 변하기 시작하였다. 이 걷잡을 수 없는 머리털의 거센 데모를 진압할 길이 정녕 없을까? 공수부대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공수부대는커녕 경호원도 없는 주제에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던 중 순수 교포 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에서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집요한 부탁과 교포상대 위주로 일할 수 있다는 본래의 남가주 행 목적에도 부합해 승낙하였다. 새 직장의 업무를 파악하고 일하는 데 보람을 느끼기 시작한 지 1년여 만에 은행이 문을 닫게 되어 이번에는 타의에 의해 실업자 신세로 전락하였다.

 

! 이 무슨 월급쟁이의 비애였던가! 머리털의 데모는 더욱 기세를 올렸고 기숙사 사감 선생의 눈총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또다시 이번에는 크고 안전한 미국 직장을 찾아 옛날과는 달리 검은 머리털의 소유자 아닌 흰머리로 변신한 모습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모가 주신 원래의 검은 머리털은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으며, 공수부대의 부재 속에 데모는 오늘도 부단히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