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제10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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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모음 1

   [ 沈薰의 상록수기념관과 沈載英 古宅 탐방기 ](심천보 동기의 귀향)       

 

                                                                                                                                        - 이범상 -            

                                                                               

서울고10회 동창회에서  지난 5월31일, 충남 당진시 부곡리 소재 심훈의 상록수기념관과 

심재영고택을 탐방하였습니다.    (백승욱부회장, 최희관부회장, 이범상 일행)

           

소설 상록수와 작가 심훈에 대해서는 출간된 수많은 자료원을 통하여 열람할 수 있고 또한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시리라 믿기 때문에,  이 탐방기에서는  상록수 소설의 주인공 박동혁의

모델이 되었던 실존인물 농촌계몽운동가 沈載英 선생과 그의 맏아들인 심천보 장로(서울고 10회동문)에

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심천보 동문은 1965년에 도미유학길에 오른지 46년만인 2012년에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부인 이경숙

여사와 함께 충남 당진시 부곡리의 옛 고향집으로 귀향하고,  선친이신 고 심재영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선친께서 생전에 못 다하신 상록수정신운동을 계승하고, 앞으로 나올 젊은 상록수들을 키워내는 사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심천보 동문이 상록수 제8권 (2011년1월 발행, 사단법인 심훈 상록수 기념사업회 발간)에 기고한 글을 

아래에 전재하여 소개합니다.

        Click-->[ 내 고향 당진, 부곡리 상록수 고향으로! ]

           

 농촌계몽운동가 심재영(沈載英) 에 관한 글은 몇몇 참고문헌중에서 발췌하여 아래에 옮겨 적습니다.

 

(1).  [상록수 제8호 심훈과 상록수 주인공]중에서 발췌한 글

1930년대에 당진 부곡리에서 상록수소설속의 주인공 박동혁의 모델이 되었던 심재영선생이 "공동경작회"

를 조직하여 운영하며 경작지를 늘리고 1935년에는 "야학당"을 세우고 운영하였으며, 1962년에 이르러

그 야학당 자리에 상록학원이 개원되자 심재영선생을 초대 원장으로 청빙하였다.

당시 심재영선생이 중심이 되어 이끈 당진 부곡마을의 "야학당과 공동경작회"는 조직적인 농촌계몽운동

의 효시가 되었으며,후에 4H구락부로 발전하여 전국적인 농촌부흥운동의 모태가 되었고, 1960년대 

박정희대통령시대에 이르러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상:  상록수 제8호 "심훈과 상록수 주인공"중에서 발췌)

 

(2). [상록수, 정호영역음, 현대문학,  출판사서평]중에서   발췌한 글

[상록수]의 두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은 실제 인물 심재영과 최용신을 모델로 하여 만든 인물이다.

심재영沈載英은 심훈의 조카로 경성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인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로 돌아와

1932년부터 야학을 열어 농촌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편 동네 청년들과 '공동경작회'(소설 속의 농우회)

를 만들어 막다른 궁지에 내몰린 농민들의 활로를 찾고자 애썼던 사람이다. 부곡리에 '필경사筆耕舍'

를 짓고 글쓰기에 전념하던 시절, 심훈은 바로 옆에서 심재영의 이 같은 활동을 보고 마음속에 여투어

두었다가 [상록수]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3). [상록수  심훈]  [우리가 알아야 할 한국고전] 김욱동/현암사]  중에서 발췌한 글
심훈은 [상록수]를 쓰는 데 실제 사건과 인물한테서 큰 도움을 받았다. 앞에서 밝혔듯이 남주인공

박동혁은 작가의 큰 조카인 심재영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심재영은 경성 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상급

학교에 진학하라는 부모의 권유를 물리치고 고향인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돌아와 ‘공동 경작회’를

만들어 농촌 운동을 벌이며 농사를 지었다. 심훈이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로 삼은 실제 인물은 최용신

이다. 그녀는 협성 신학교 재학중 기독 청년회 농촌 사업부의 특파원 자격으로 경기도 수원시 반월면

천곡리에서 야학을 통하여 농촌 계몽 운동을 벌이다가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작가는 이 두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들과 관련한 사건을 작품의 플롯의 뼈대로 삼는다. 심재영과 최용신은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지만 심훈은 그들 사이에 허구적 로맨스를 만들어 낸다. 뒷날 최용신이 사망하였을 때

심재영은 ‘허구적인 연인’이라고 할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애도를 표하였다.

 무심코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쉽지만 ‘상록수’라는 제목도 찬찬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심훈이

박동혁의 모델로 삼은 심재용의 회고에 따르면 작가는 이 작품을 쓰면서 여러 제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심재영은 “삼촌은 나보다 십일 년 연장이었기에 매우 친하게 지냈지요. 작품을 다쓰고 나서

제목 문제로 고심하더군요. 내게 골라 보라고 내놓은 것은 ‘해당화’, ‘여명’, ‘상청수‘, ’상록수‘등

이었지요. 나는 ’상청수‘보다 ’상록수‘쪽을 권했어요.”하고 밝힌 적이 있다.

  심훈이 이 소설의 제목을 ‘해당화’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은 두 주인공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 때문

이다. ‘해당화 필때’라는 제목의 한 장에는 바닷가에서 동혁이 영신을 처음 껴안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동혁은 영신에게 “해당화는 지금 이 가슴속에 새빨갛게 피어 있지 않았어요.”하고 말한다.

제목을 ‘해당화’로 생각한 것은 젊은 남녀의 사랑이 주축이 되는 이야기로 본 것이다.

 

(4). ["상록수 실제모델 심재영과 공동경작회" "당진시대" 심훈기념사업회 제공]  에서 발췌함

              http://www.dj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749

 

 아래 사진은 1937년 6월28일에 촬영한 부곡리 공동경작회의 모습이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공동경작회를 조직한 심재영씨다. 박동혁의 실제인물인 심재영씨는 서울에서 농업전문학교를 마친후

1930년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고 단신으로 송악 부곡리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동네 청년 12명과

공동경작회를 꾸려 문맹퇴치와 생활개선운동을 벌여나갔다.
심훈선생이 부곡리로 내려온 것은 1932년. 심재영 씨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심훈선생은 필경사를 짓고

집필에 몰두해 문제작 상록수를 탄생시켰다. 공동경작회는 일제의 강제 공출로 인한 운영난과 회원들이

하나 둘 징용으로 끌려가 결국 1941년에 해체되고 말았다. 척박한 식민지 농촌에서 계몽운동으로

청춘을 불살랐던 심재영씨는 지난 95년 4월5일, 부곡리 자택에서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심재영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인간은 누구나 ‘사명’을 갖고 태어난다”

그 사명을 저버리지 말고 참되고 진실되게,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면서 살 것”을

젊은이들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받는 사랑은 빚이지만 주는 사랑은 재산이므로 반드시 주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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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은 참고문헌에서 발췌한 글)

 

 

  **. 심재영古宅    상록수소설과 상록수 농촌계몽운동의 산실

  동영상 1 :   아래 주소를 Click하세요.  동영상이 열리지 않는 경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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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eoul10.org/0user_data/2013_shimchunpo/kotaek.htm

 

 

[ 96세이신 미망인(심천보장로의 모친)께서 살고 계신 고택의 넓은 정원에는 꽃들이 만발하고

  정문으로부터 진입도로 양측에 간송 수백  그루가 빽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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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자 일행은 심재영 고택을 방문하고,  96세로 장수하시는 미망인 (심천보장로의 모친)을 뵙고

큰절을 올리고 나서, 심훈이 1932년에 당진부곡리 장조카 심재영집에 내려와 2년간 기거하면서 작품을

집필하던 사랑채에 들어가,두 고인의 影幀을 대하니, 손때 묻은 유품들에서 두분의 체취가 느껴지면서,

작가 심훈과 농촌계몽운동가 심재영선생이 일제의 압제에 항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며, 농촌계몽운동

의 절실함을  열변하시던 음성이 들리는 듯  하였습니다.
 

[古宅의 사랑채 ]:

좌측에 안경 쓴 미남 청년이 심훈. 36세로 요절하여 젊은 사진 밖에 없다. 이 사랑채에서 2년간 

기거하면서 여러 편의 소설을 집필하였고, "장조카인 심재영의 농촌계몽운동을 가까이 보면서, 

그를 모델로하여 소설속의 주인공 박동혁이란 인물을 구상하고  상록수소설의 플로트를 완성하였다"

합니다.
우측의 밀집모자 사진이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이자 이집의 주인이신 심재영선생의 노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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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택 앞마당에 애향가석-- 해방전 애국가곡인 올드랭사인곡에 심훈이 애국가 가사를 개작하여  

   부르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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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보장로의 작은 할아버님이신 심명섭목사(심훈의 형님)의 부인이신 권유희 권사님이 6.25동란중인

1950년대 초에 세우셨다는 상록수교회가 바로 뒤 언덕 위에서 고택을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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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훈의 필경사 (筆耕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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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의 필경사 내부사진을 보려면 이 사이트로 들어가 보세요 

                   http://blog.daum.net/geuljib/27

                

 **  심훈기념관   

  동영상 2 :    아래 주소를 Click하세요.  동영상이 열리지 않는 경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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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기념관을 돌아 보던중, 청송 심씨의 가계족보를 일별하니,

세종대왕의 장인이신 심온(沈溫) 영의정을 중시조로 하여 내려오는 가계도에 영상벼슬이 여섯분이나 보입니다. 

역시 그런 조상에서 그런 후손들이 배출된 듯 합니다.

심재영선생의 선친이신 심우섭씨는  <매일신보>기자를 거쳐 방송국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둘째숙부 심명섭씨는

교회 목사였으며, 셋째 숙부가 심훈(대섭)선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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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훈기념관의 더 많은 자료를 보려면 다음 사이트로 들어가 보세요.

   -->  http://blog.naver.com/ky7000?Redirect=Log&logNo=110164510348

 

       

심천보장로는 서울공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후 도미하여  University of Pittsburgh에서

건축구조공학을 전공하고, Pittsburgh의 건설회사에서 한 회사에서만 43년간 72세까지 근속하다가

2012년에 46년만에 귀향하였는데, 2000~2003년에는 인천국제공항건설공사에 미국건설회사 한국주재

책임자로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주)SY 테크"라는 건설회사에 고문으로 위촉되어, 선진 건설

기술의 국내전수와 후배 기술인의 지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1남은 Harvad Law School을 나온 변호사이고, 2남은 Stanford 대학

MBA 출신으로 미국 큰 회사에서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으며, 두 자부들도 둘 다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손주들 커가는 모습이나 보면서 미국에서 편안한 노후생활을 즐길 나이에 부곡리 옛고향 집으로

귀향하여,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고자 상록수교회와 상록수정신문화사업을 지원하고 있는 심천보동문를

보면서, 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갈 것인가? "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심훈의 1930년 발표작, 그의 대표적인 저항시  "그날이 오면"을 옮겨 실으면서 탐방기를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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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 일본의 검열당국에 의해 게시 금지 당하여 삭제되었던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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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훈과 상록수에 관한 자료

              http://www.seelotus.com/gojeon/hyeon-dae/soseol/sim-hun-sangrogsu.htm